"멋 부린다고요? 살아남기 위한 전략입니다"

김용대(47·자영업)씨는 지난해부터 맞춤 양복점에서 정장을 맞추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데다 통통한 편이라 기성복을 입을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으니까 날씬하고 젊어 보이는 것 같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가 맞춘 바지의 폭은 원래 입던 옷보다 1㎝, 길이는 2㎝ 정도 줄어들었다. 한 벌에 100만원 넘는 돈이 부담스럽지만, 만족도는 훨씬 높아졌다.

중년이 변하고 있다. 중년의 개념과 함께 그들의 겉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중년이 '노년의 전기(前期)'가 아니라 '청년의 연장(延長)'이 되면서 더 젊고 세련되어 보이려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중년, 찢어진 청바지 매출 3배 늘어

김씨처럼 '몸에 착 감기는' 정장을 찾는 중년은 이제 쉽게 만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젊은 층이 찾던 '슬림핏'(Slim fit·몸에 달라붙는 스타일) 트렌드는 2009년을 기점으로 일반 남성 정장과 캐주얼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3~4년 뒤 국내 기성복 브랜드에서 아예 제품의 절반 정도를 슬림핏으로 출시했다. 당시 남편에게 '슬림핏'을 입히려다 부부 싸움이 났다는 기사가 나올 만큼, 중년 남성들이 통 좁은 바지와 재킷에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 중년층에도 슬림핏은 보편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패션에 대한 중년의 관심은 정장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온라인 쇼핑몰 지마켓에 따르면 올해 40~50대 남성의 빈티지 청바지 구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27% 증가했다. 스키니 팬츠, 후드집업(모자가 달린 상의), 운동화(스니커즈)의 구매량은 각각 18%, 259％, 294% 늘었다.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에서도 올 1분기 40~50대 남성 소비자의 구매액을 분석한 결과, 브랜드 잡화는 82％, 수입 명품 51％, 화장품, 향수는 50％ 많아졌다.

신세계백화점의 올해 남성전문관 소비층 분석에 따르면 남성 소비자 비중이 지난해 37%에서 올해 50%로 증가했다. 이곳을 주로 찾는 고객은 경제력이 있는 40대 이상이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펜디와 루이비통 같은 해외 브랜드도 국내 백화점에 남성 전문 매장을 열 계획이다.

◇중년은 청년의 연장

패션에 신경을 쓰게 된 중년의 변화는 이들의 평균 기대 수명과 무관하지 않다. 평균 기대 수명이 70~80세였을 때는 40대에 들어서면 중년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 40대 초반은 중년 축에 끼기 힘들다. 지난해 영국 '베네든 헬스'라는 연구기관에서 남녀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종전에 41세로 생각했던 중년의 기점이 53세부터라는 결과가 나왔다. 배정원 행복한성상담연구소장은 "요즘 50대 초반~60대 중반을 '중년'이라고 보고 있다"며 "40대, 심지어 50대 상담자도 중년 취급을 받으면 화를 낸다"고 했다.

중년에 대한 개념의 변화는 대중문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최다 관객을 동원한 황정민이나 최근 '아재 파탈'(아저씨의 매력) 열풍을 몰고온 조진웅, '마요미'로 불리는 마동석은 모두 '아저씨'의 범주에 속하는 남성들이다. 예능에서도 유재석과 신동엽 같은 40대 중반의 남자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들이 '매력적인 중년'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중년 남성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졌다. 비슷한 현상은 일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명 '우레단'(熟男·성숙한 남자)이라고 불리는 중년 남성들이 20대 여성들의 연애 대상으로 인기다.

중년을 위한 청바지와 '슬림핏' 정장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2012년, 한국트렌드연구소는 '거품 청년'이란 키워드를 내놨다. 기대 수명이 90세를 넘길 가능성이 높아진 시대에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60세 이후에도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함께 갖고 있는 남자들을 가리킨 말이다. 중년들이 더 젊어 보이기 위해 패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20~30대 청년들과 경쟁하고 이들과 함께 일하려면 청년 같은 중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