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님, 감고당길 갑시다… 어디요?

지난 10일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 리팅(李婷·27)씨는 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가려고 택시를 타려다 낭패를 겪었다. 택시기사 여러 명에게 여행 팸플릿에 적힌 '감고당길'에 가자고 했는데, 모두 "어디인지 모른다"고 한 것이다. 리씨는 관광 안내 지도를 보고 지하철로 안국역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근 가게 종업원들에게 "감고당길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리씨는 "관광 명소라고 책자에 소개된 곳인데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조차 길 이름을 몰라서 의아했다"고 했다.

'감고당길'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100m 거리에 있는 골목길로, 풍문여고부터 정독도서관을 잇는 길이다. 원래 도로명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 3길인데, 종로구가 작년 12월 인현왕후의 친정집인 감고당을 기념하기 위해 '감고당길'이란 명예도로명을 붙인 것이다. 명예도로명은 주소로 사용하는 법적 도로명과 달리 지자체(기초 단체)가 중앙정부나 광역단체와 협의 없이 자체적으로 붙인 '별칭'이다. 기초단체들은 관내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홍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명예도로명을 만들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5개 자치구의 명예도로명은 2013년 말 11곳에서 2015년 말 21개로 2년 만에 거의 2배로 늘었다.

문제는 기초단체들이 만든 명예도로명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바람에 오히려 주민들의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하니희망길'과 '하니사랑길'은 2010년 명예도로명으로 지정됐지만, 내비게이션이나 인터넷 지도 검색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른 명예도로명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서울 용산구는 작년 10월 녹사평대로 40다길 1~62구간을 '유관순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유관순 열사가 옥사(獄死)한 뒤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유관순길'은 이미 2010년 4월부터 유 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고향(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법적 도로명으로 지정돼 있다. 내비게이션에도 천안시의 유관순길만 나온다. 하니희망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50)씨는 "기존 지번(地番)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바뀐 지 3년밖에 안 돼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명예도로명까지 뒤섞여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명예도로명이 주민 편의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된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 은평구는 지난달 '이호철길' '정지용길' '백초월길'이란 3개의 명예도로명을 한꺼번에 발표했다. 은평구와 연고(緣故)가 있는 문학가와 독립운동가를 기념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가 건립하려는 국립 한국문학관을 은평구에 유치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은평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 이모(26)씨는 "은평구청이 명예도로명 지정과 함께 한국문학관 유치를 기원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곳곳에 붙였다"면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분들이 구청의 졸속 행정에 동원된 것 같아 씁쓸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