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와 전쟁… 서울이 졌다

지난 17일 오전 4시쯤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 자락 민가에 멧돼지 12마리가 내려와 밭을 헤집고 다닌다"는 신고가 119로 걸려왔다. 주민 한모(43)씨는 "멧돼지들이 이렇게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건 처음 봤다"면서 "엽사(獵師)들이 출동할 때까지 무서워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고 했다. 지난 10일 오전 6시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주택가엔 무게 180kg짜리 멧돼지가 나타나 도심을 활보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록 잡히긴 했지만 인근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환경부, 국립공원관리공단, 야생생물관리협회 등과 '멧돼지는 산으로!'라는 업무 협약을 체결하면서 "적극적으로 멧돼지를 포획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멧돼지 출현이 가장 빈번한 북한산국립공원과 북한산 인접 6개 구(종로구·은평구·도봉구·성북구·서대문구·강북구) 일대에 철제 포획틀 8개 등을 설치했다. 시는 또 자치구당 20여명의 엽사들로 이뤄진 '멧돼지 출현 방지단'도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는 올 들어 '멧돼지와의 전쟁'에서 완패하고 있는 분위기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총 80건의 멧돼지 출몰 신고가 접수됐다. 한 번에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어 많게는 수백 마리의 멧돼지가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중 포획된 멧돼지는 27마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북한산에 약 120마리의 멧돼지가 서식 중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현장 경험이 많은 엽사들은 "실제로는 최소한 300마리 이상이 북한산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시의 예상보다 두 배 이상 멧돼지가 많다는 주장이다.

멧돼지 개체 수가 최근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뭘까. 봉사 단체인 '멧돼지 출현 방지단'의 윤계주(53)씨는 "지난 3년 동안 따뜻한 겨울이 이어진 데다 작년과 올해에 마른장마까지 겹쳐 새끼 멧돼지들의 생존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멧돼지 개체 수 조절에 실패한 원인은 또 있다. 지난해 2월 경기도 의정부, 세종시에서 엽총을 사용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경찰청은 엽사가 총기 수령을 할 때 여러 가지 절차를 밟도록 하는 등 총기 규정을 강화했다. 멧돼지 출현 방지단에서 활동 중인 지용선(57)씨는 "엽총 반출이 까다로워지면서 현장에 출동했을 땐 이미 멧돼지가 도망치고 없는 경우가 많다"면서 "멧돼지를 추격해 잡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다른 생업을 가진 자원봉사자들의 참여가 예전보다 줄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사용하고 있는 포획틀(가로 0.68m, 세로 1m, 길이 2.2m 크기) 역시 멧돼지를 유인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포획 틀이 너무 작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새로운 형태의 포획 틀을 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멧돼지 출현 방지단의 한 봉사자는 "멧돼지가 먹이를 찾기 어려워지는 10월 무렵부터는 훨씬 자주 도심으로 내려올 것"이라면서 "서울시가 자원봉사자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전문 인력을 상시 대기시킬 수 있도록 대비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