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래서 더 절절했던 여인

덕혜옹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나라를 빼앗겨 아무런 힘도 없는 '식물 왕가'에서 여자로 태어난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 덕혜옹주를 갖고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가장 우려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8월 3일 개봉)는 이런 한계를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억지 감정, 물량 공세 따위를 동원할 필요 없이 정직한 연출과 성실한 연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종(백윤식)이 환갑 때 태어난 덕혜옹주(손예진)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그가 8세 때 고종은 세상을 떠나고, 13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일본에 가기 싫어서 어머니 양귀인의 무릎을 부여잡고 놓지 않아 사람들이 떼어내야 할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영친왕의 가족과 함께 산다. 일본 군인으로 위장한 독립운동가 김장한(박해일)이 영친왕의 부관이 되면서 이들은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계획한다.

왕조의 몰락은 애조를 자아낸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나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영화나 문학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덕혜옹주란 인물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장점도 그 존재만으로도 한(恨)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신파나 우상화를 통해 이런 부분을 강조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그 덫을 모두 피해간다. 덕혜옹주를 운동가로 포장하지 않고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고 조선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평범한 여성으로 그려낸다. 이런 소박한 바람도 이룰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거듭되면서 관객들도 연민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을 쌓아간다. 어릴 때부터 덕혜옹주를 돌봐준 유모이자 그의 유일한 동무인 복순과 일본에서 헤어지고 한국에서 재회할 때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영화 초반부터 두 사람의 감정을 촘촘하게 쌓아올렸기에 가능한 것이다. 덕혜옹주뿐만 아니라 복순이, 김장한, 영친왕,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 여사 등 모든 등장인물의 감정이 씨실과 날실처럼 한 폭의 영화를 직조해간다. 감정을 눌러 담았다가 조금씩 발산하는 손예진과 박해일의 연기가 큰 역할을 한다.

영화를 이끄는 중심 역할은 어린 시절 덕혜옹주의 친구였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그의 조력자가 되는 김장한이다. 고종의 주선으로 덕혜옹주와 약혼을 했던 김장한과 훗날 덕혜옹주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힘을 쓴 김장한의 형 김을한을 합친 가상의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와 덕혜옹주는 서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그 감정이 직접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한 발짝 물러서서 서로를 지켜보고 지켜주는 관계다. 이는 애틋한 긴장 관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김장한이 끝까지 덕혜옹주를 위하고 돌보는 데 대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같은 잔잔한 멜로 영화로 잘 알려진 허진호 감독의 장기가 돋보인다.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덕혜옹주란 인물로 드라마를 만들고 그가 조선에 돌아가야 할 당위성도 부여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허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김장한이 등장한 것이나 상하이 망명을 기도한 것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불필요한 부분도 있다. 덕혜옹주가 일본의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거나, 일본에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부분은 억지로 넣은 '설정'처럼 느껴진다. '덕혜옹주'는 시대의 광풍에 정처 없이 흔들린 한 여자의 삶만으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다.

올여름 개봉하는 네 편의 대작('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터널') 중 자극이 가장 적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울림은 없다는 얘기다. 센 불에 급하게 튀겨내는 음식이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가끔은 뭉근하게 끓여내는 음식도 먹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