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록 옆에 끼고 누워 '안방 유람' 즐겨보세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유몽인 외 지음｜전송열·허경진 편역
돌베개｜372쪽｜1만8000원

폭염 나흘에 폭우 하루. 혹독한 여름이다. 가까운 산과 계곡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지만, 밤을 제외하면 겨를 없는 나날이다. 내 방에 누워 명승(名勝)을 즐길 방법은 없을까.

당신을 위해 '와유록(臥遊錄)'이 있다. 사랑채에 누워 팔도강산 유람하기. 시간보다는 교통과 비용의 문제였겠지만,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명산 유람은 소수에게만 가능했던 예외적 쾌락. 그러니 타인의 산수유람기는 탐독의 대상이었고, 이를 십분 의식했던 당대의 '와유록'은 명문(名文)의 경연장이었다.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팔도의 명산 20곳을 유람한 기록이다. 유몽인·최익현·채제공·주세붕·이황 등 학문 높고 문장 좋기로 이름난 선비들의 산유기(山遊記). 한라산·지리산·무등산은 물론 백두산·금강산·묘향산 등 북의 명산까지 아울렀다. 정원림(1731~1800)의 '동국산수기'에 수록된 글이 중심이지만, 이 책의 편역자인 허경진·전송열은 다른 몇 편을 추가로 옮겨 총 20편을 계절순으로 엮었다.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에 오른 주세붕(1495~1554)의 4월 11일 일기 한 대목이다. "구름 기운은 위에서 감싸 도는 것도 있고 아래에서 찌듯이 솟구치는 것도 있으며, 바위 틈새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왔다가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것도 있었다. 또 쌓여 있는 흰 눈 모양 같은 것, 달리는 개 모양 같은 것, 맑고도 무성한 것들을 내뿜고 들이마시는…."

청량산 수천 봉우리의 해 질 녘 구름을 묘사하는 주세붕의 문장이다. 글 좋기로 이름난 중국의 추석(騶奭)도 이를 다 나타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했지만, '찌듯이 솟구치는 구름'과 '달리는 개 같은 구름' 같은 주세붕의 직유는 '안방 여행자'에게 눈으로 뛰어들 것 같은 생생함을 안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더 육향(肉香)을 직접 맡고 싶다는 욕망을 배가시킬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풍경 묘사에 그친다면 선비들이 아니다. 산의 유래와 기원, 그리고 의미와 성찰로 나아간다. 귀양지에서 유배가 풀려 한라산에 오른 최익현(1833~1906)이 그 예다.

"백두산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천리를 달려 영암의 월출산이 되고, 또 남쪽으로 달려 해남의 달마산이 되었으며, 이 달마산은 바다를 넘어 5백리를 달려 추자도가 되었고 또 500리를 건너서 한라산이 되었다."

한라산의 유래를 해설한 그는 이제 이름의 기원에 대한 설왕설래를 소개한다. "이 산이 아주 높아서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하다고 하여 한라산"이라는 주장, "외래 선박이 정박했다가 이곳 산물을 실어가려고 하면 번번이 비바람을 만나 난파하므로 탐산(眈山)"이 됐다는 설(說)…. 하지만 최익현은 이런 유래를 근거 없는 것이라 단칼에 자른 뒤, 한라산의 존재 의미는 볼거리가 아니라 백성과 나라에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산해진미의 산지이며, 이 지역 6만~7만 가구의 경작과 채굴 역시 한라산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리산과 금강산처럼 사람들에게 볼거리만을 제공해주는 것과 어찌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한라산은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이지만, 큰 바다의 기둥이요, 삼천리 한반도 해양의 입구이며,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도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제 경이로운 자연에 대한 감탄이나 우국에의 충정을 넘어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이 책을 읽을 차례다. 강원도 삼척부사로 있던 김효원(1542~1590)은 동해와 삼척에 걸쳐 있는 두타산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궂은 것을 감추어 주는 산과 숲의 도량에서 가슴 넓힘을 배우고, 맑고 서늘한 기운에서 누추함과 더러움을 씻어 버림을 배우게 되지. 또 게으름과 타락에 떨어지고, 경박함과 조급함으로 발끈 성을 내며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고, 애걸복걸하며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산과 물의 도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물과 산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옛 성현들은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거기에서 취한 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풍경이나 맛집 사진만 가득한 현대의 SNS 여행기에서 허기와 갈증을 경험한 당신이라면, 이 희귀한 산수유기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새 경지를 만끽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