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8.03 03:21

[허술한 운전면허 갱신 시스템]

치매·뇌전증·알코올중독 등 운전자 본인 신고에 맡겨둬
美선 의사·경찰·가족 등이 운전 부적격자 신고하게 유도
"운전면허 갱신 때만이라도 의료정보 공유해야" 주장도

"시력만 알아보는 게 운전면허 적성검사라고 할 수 있나요?"

2일 서울 강서운전면허시험장에서 운전면허(1종 보통) 정기 적성검사를 받은 이종석(61)씨는 "지금 면허 갱신 제도가 제대로 된 적성검사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노안 때문에 원시(遠視)가 심하지만, 시력검사를 2분 만에 통과했다. '운전하기에 부적합한 질환이 없다'고 신고서를 작성하는 시간도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최근 노안이 와서 먼 게 잘 보이고 가까운 쪽은 어둡게 보이는데 상담하고 싶어도 그런 과정 없이 순식간에 검사를 통과했다"며 "검사가 허술해 1만원이 넘는 수수료가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2일 오후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시민들이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하고 있다.
2일 오후 서울 강남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시민들이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하고 있다. 이 시험장에선 시력 검사와 함께 '앉았다 일어서기', '손 쥐었다 펴기' 1~2회 등으로 신체검사를 마쳤다. 신체검사를 받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1~2분에 불과했다. /김지호 기자
현행 운전면허 갱신 제도 시스템이 지나치게 단순해 운전하기 어려운 사람을 걸러내는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 취재 결과 1종 면허 소지자가 받는 정기 적성검사는 신체검사를 포함해 모든 과정이 5분 안팎에 끝나고 있었다. 도로교통법상 2011년 12월 이후 운전면허 소지자는 10년에 한 번씩 면허를 갱신해야 한다. 1종 면허 소지자는 시력검사와 운전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고, 스스로 질환 보유 유무를 적어내면 검사에 통과할 수 있다.

2일 서울 시내 면허시험장 대부분에서 피검자들은 시력검사만 통과하면 누구든 면허를 갱신할 수 있었다. 일부 시험장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 등을 검사했지만, 역시 한두 차례에 그쳤을 뿐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이날 1종 정기 적성검사를 통과한 심모(45)씨는 안경이 없으면 이정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지만 안경 없이 20초 만에 시력검사를 마치고 검사를 통과했다.

2종 면허 소지자는 그마저도 없었다. 이날 서울 마포경찰서에 운전면허를 갱신하러 간 권모(35)씨는 1분 만에 2종 보통 면허를 갱신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는 그는 "신체검사나 건강진단서 하나도 요구하지 않고 반명함판 사진 1장과 수수료 7500원만 내니까 간단히 면허를 갱신할 수 있었다"며 "심각한 질환이 있는 2종 면허 소지자들을 걸러낼 방법이 사실상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후천적 신체 장애자나 정신 질환 등으로 6개월 이상 입원해 기관 통보를 받은 환자들은 운전면허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가 된다. 그렇다고 면허 자체를 취소당하는 일은 흔치 않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작년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6146명) 중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188명에 불과했다. 치매나 뇌전증, 알코올중독 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1641명) 중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6명뿐이었다. 작년 9월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분석한 도로교통공단 자료에 따르면,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의 운전면허 자격을 심사하는 판정위원 중 75%가 공단 직원 등이었고 25%만이 의사였다. 박 의원은 "면허 자격을 판정할 때 의료진의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데, 판정위원회는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면허를 갱신한 운전자들은 "검사가 부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본지 취재진이 이날 서울 시내 면허시험장 4곳을 찾아 적성검사를 받은 50명을 조사한 결과, 40명(80%)이 "적성검사가 충실하지 않다"고 답했다. 박모(52)씨는 "최근 사고를 봐서라도 정신 감정이 꼭 필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지병 여부나 나이에 따라 검사 항목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모(29)씨는 "지금처럼 검사한다면 내가 실제로 병이 있다고 해도 거짓말하고 갱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모(43)씨는 "운전자들이 좀 귀찮아지더라도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택영 수석연구원은 "운전자들이 양심적으로 자신의 결격 사유를 신고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가 잘 작동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보완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에선 운전면허를 갱신할 때 자기 신고 방식을 보완하기 위해 법원, 경찰, 의사, 가족 등이 자발적으로 당국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김진형 교통안전공단 교수는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거나 갱신할 때만이라도 의료 상태 등 개인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개인 정보 동의'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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