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무너진 터널에 갇혔다… 아니, 난 현실에 갇혔다

정수(하정우)는 생일을 맞은 딸을 위해 케이크를 사고 집에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른다. "기름 3만원만 넣어 달라"는 주문을 잘못 알아들은 할아버지가 기름을 가득 채우지만 그는 "괜찮다"고 말한다. 대신 500㎖짜리 생수 두 병을 받았다. 자동차 세일즈맨 정수가 계약 성사 전화를 받고 기뻐하는 순간 터널이 무너진다. 이때 관객은 이미 정수의 생존 조건(케이크, 생수, 기름, 휴대전화)과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긍정적인 성격을 알고 있다. 영화 '터널' 상영 5분 만에 관객은 정수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정보를 얻은 것이다. 2년 전 '끝까지 간다'로 호평받은 김성훈 감독의 신작이다.

이 영화가 '무너진 터널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라는 게 알려지자 관 안에 갇힌 남자를 다룬 '베리드'(2010)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나왔다. 하지만 '터널'은 무인도에서 홀로 생존해야 하는 남자를 다룬 '캐스트 어웨이'에 더 가깝다. 구출이 될 때까지 한정된 공간과 자원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정수의 상황은 서스펜스가 아니라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터널 안에서 이뤄지는 정수의 생존기와 터널 밖에서 구조대장 대경(오달수)과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이 벌이는 구조기의 비율이 7:3 정도다. 영화는 정수에게 특별한 성격이나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 대신, 선한 의지를 가진 보통 사람으로 설정한다. 그는 사소한 일에 즐거워하고 화도 내는 소시민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긴 해도, 영웅은 아니다. 그래서 관객은 불안해하다가 웃기도 하고, 울다가도 삶의 의지를 다지는 그의 감정 변화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얼핏 어둡고 답답한 영화라는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간다'에서 보여줬던 김 감독의 유머 감각이 이런 우려를 불식시킨다. "물이 없으면 오줌을 마시라"는 구조대장의 진지한 충고에 정수가 "마셔보셨어요, 오줌?"이라고 반문을 하거나 유일한 식량인 케이크를 못 먹게 됐을 때 아이처럼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의 웃음은 설정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일상의 아이러니에서 나온다. 김 감독은 "정수가 기뻐할 때 나쁜 일이 생기고, 슬퍼할 때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고 했다.

터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부와 언론을 풍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수를 구출하느라 구조대원이 죽고, 그의 구출 작전 때문에 인근 터널 공사가 지연돼 경제적 손실이 생긴다. 시간이 지나자 정수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해간다. 기존 재난 영화에선 인간 군상 중 이기적인 캐릭터를 넣어서 관객의 분노를 이끌어냈다면, 이 영화는 그런 이분법적인 접근을 지양한다. 재난을 맞닥뜨린 사회의 모습을 대중 영화에서 할 수 있는 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터널'은 올여름 4개 대작 중 가장 늦게 개봉했지만, 대중성과 완성도의 균형이 가장 뛰어나다. 감정과 캐릭터의 낭비 없이 만들어진 영리한 영화다. 강요나 애원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정직한 영화이기도 하다. 1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