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중국 서안을 거쳐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방향의 실크로드 배낭여행을 떠난 지 1달이 넘었다. 올초에 동남아 2달을 돌더니, 봄엔 중미 50일, 이번 여름엔 실크로드란다. 중반의 나이를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배낭여행을 즐기는 친구 덕분에 덩달아 현장 구경을 실컷한다. 다니는 곳곳 새로운 곳만 보면 영상으로 보내오는 덕분이다.
친구에게 물었다. “너 어디까지 갈 거냐?” 물론 출발 며칠 전에 일정을 보여주었다. 2~3일 머물 도시 이름하며, 교통편, 들를 명소, 숙소 등등 2~3장 빽빽 적힌 여행 일정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걸작이다. “이 중, 절반은 아마 바뀔 수도 있다!” 바뀌는 이유는 자유여행자의 공통 사항일지도 모른다. ‘괜히 비가 와서’, ‘옆 사람이 좋아서’, ‘모르는 곳이 또 생겨서’, ‘첫사랑 애인이 생각나서’ 등등 우연의 법칙이 존재하는 모든 경우일 거다.
하루가 멀다하고 영상을 보내오다 며칠 뜸했었다. 그리고 다시 보내온 장면은 사막이었다. 사막을 31시간 열차와 버스만 타고, 세상이 바람 스치듯, 구름이 사막 스치듯, 그냥 바라만 보고 스쳤다는 것. 오랜만에 온 문자와 영상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막의 바람이 문자들을 타고 화끈거렸다.
“너 어디까지 가는 거냐?” 친구가 말 떨어지기도 전에 대답했다. “크크크, 갈 데까지 가는 거지 뭐!” 슬슬 장난기가 발동해 말꼬리를 이었다. “목마를 텐데!” “히히, 흐르는 거 다 먹어!” “배고프면?” “그냥 바람 마셔!” “졸려도 가냐?” “꿈꿀 때도 걸어, 하하하!” 친구 대답이 거침 없다. 이 쯤이면 심술도 열대야 숨결보다 저홀로 먼저 지친다.
그랬다. 여행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흐르는 시간에 바람에 나를 맡기는 것만이 의미있다. 자유란 단어든, 고민이든, 먹거나 자는 거나, 걷는 것 등등이란 지금이란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 이것을 즐거움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 그 친구 여행의 목적일 수도 있었다.
어디를 다니든 그곳은 나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냥 누구와 함께 있었을 뿐. 그 누가 지금은 없을 뿐. 그 자리를 누가 와서 채우든 상관 없을 뿐. 그랬다, 누가 오든 가든 손짓 하나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냥 스쳐 지나가고 싶을 뿐. 아니 왔으니 그냥 가는 것일 뿐. 내게 꼭 맞는 장소와 시간이 어디 있으랴! 내가 맞춰 내 시간을 잡고 지나쳐야 할 뿐.
가끔 친구와 선술집을 전전하는데, 그 끝자락은 괜한 세상 투정이 안주를 대체한다. 온갖 부조리에 대한 불만은 결국 나로부터 출발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많아지는 세상 투정을 뿌리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면서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이럴 땐, 억지라도 외쳐야 한다. 뭐, 싫어도 그냥 맞다고. 맞다고 끄덕일 적마다 숨이 막이는 일, 이럴 때마다 더욱 고개 숙여야 한다고. 네 것이나 내 것이다 뭐 마찬가지라고. 그저 끌어 안을 때마다 하늘이나 지나는 바람을 볼 일이라고.
이런 저런 말들을 주고 받다가, 쓸데없는 줄 알며 물었다. “내일은 얼마나 걸을 거냐?” 말꼬리 힘이 강해졌다. “하하, 갈 데까지!” “힘들어 쓰러질 텐데?” 이는 내가 묻고 대답하고 싶은 말이었다. “힘들 때마다 외친다. ‘그냥 저기까지 가자고. 보이는 것 모두 내 것이 아닌 네 것’이라며.” 그럴지도 모른다. 내 것과 네 것이 비슷해질 적, 모두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른다. “그래, 갈 데까지 가야지. 내 그 어떤 마음이 사라져, 내 안이 텅 빌 때까지!” 그렇게 친구는 나를 데리고 실크로드 곁을 지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