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태권브이가 있었다면?

한복 입은 아이가 집게손가락을 허공에 뻗고 있다. 아이보다 몸집이 수백 배 큰 태권브이가 이 소년의 손가락 끝에 자신의 검지를 맞댄다. 두 사람 뒤로는 안개에 둘러싸인 산이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와 태권브이의 '조우'. 이 엉뚱한 산수화를 그린 사람은 '태권브이' 감독 김청기(75)다.

국내 최초 로봇 애니메이션 '태권브이'를 만든 그가 태권브이 탄생 4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열었다. 이름은 '엉뚱 산수화전(展)'. 2008년부터 틈날 때마다 그린 산수화 42점을 모았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침입을 숱하게 받았잖아요. 이후에는 북한의 남침(南侵)도 있었고요. 그때마다 생각했어요. 아주 강한 태권브이가 우리 민족을 지켜주면 어땠을까 하고요. 조선시대로 이동한 태권브이, 상상만 해도 재밌잖아요?"

김 감독의 이 엉뚱함과 상상력은 태권브이를 처음 만들 때 이미 발휘됐다. 극장에서 본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본 게 시작이었다.

"그림이 막 살아 움직이면서 여기에 소리까지 어우러지는 거예요. 와, 그건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니 이전까지 내가 그려왔던 만화가 너무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결심했어요. 한국의 월트 디즈니가 되겠다고."

김 감독은 1975년 겨울 서울 광화문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뜻 맞는 사람 30여 명을 불러 모아 태권브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산을 제작비로 상당 부분을 투자했고, 석 달간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마침내 1976년 7월 24일 태권브이가 세상에 나왔다. 개봉 3주 만에 28만명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대한극장이 관객을 모두 수용하지 못해 종로3가 세기극장까지 버스를 대절해 실어 날랐다"며 "관객이 '달려라 달려~'로 시작하는 태권브이 주제가를 따라 부를 땐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태권브이는 김 감독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태권브이가 일본의 마징가Z를 따라 한 아류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날아온 것이다. 그는 "영향을 받지 않으려 애썼지만 문화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어서 의도치 않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후 김 감독은 '태권브이' 7편과 '간첩 잡는 똘이장군' 등 총 40여 편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태권브이 탄생 31주년이던 2007년에는 재개봉한 '태권브이'가 75만 관객을 모아 한국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 그는 요즘도 신작 애니메이션은 꼭 챙겨본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수작으로는 '겨울 왕국'을 꼽았다. "언니 엘사와 동생 안나가 부둥켜안는 장면을 보는데, 글쎄 일흔이 넘은 내가 울고 있는 거예요. 이런 게 바로 이야기가 가진 힘이구나, 새삼 느꼈어요."

김 감독은 아직도 현역을 꿈꾼다. "심청전, 흥부 놀부, 선녀와 나무꾼 같은 우리 고유의 전래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내 마지막 꿈이에요. 우리 동화가 갖는 콘텐츠의 힘이 있거든요. 디즈니가 절대 구현하지 못할 한국 고유의 선(線), 여백의 미를 스크린에 꼭 표현하고 싶어요. 그러면 우리 손자·손녀가 커서 내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고 '할아버지 최고'라 하지 않을까요?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