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켤 자유도 없나… '에어컨 자린고비' 만드는 누진제

9일 오후 4시 서울 신림동에 있는 임대아파트 단지. 39㎡(약 12평)가 대부분인 서민용 주택이지만 한 동 전체 72가구 중 42가구에 에어컨이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섭씨 32도를 넘는 폭염(暴炎)에도 에어컨 실외기가 돌아가는 곳은 4가구뿐이었다. 주민 권경자(70)씨는 "전기요금 무서워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현관문부터 문이란 문은 다 열고 지낸다"고 말했다. 작년 여름 에어컨을 설치했다가 월 전기요금이 30만원 넘게 나왔다는 김대성(40)씨는 "아이들이 집에 없으면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켤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전기를 많이 쓸수록 요금이 폭등하는 전기요금 누진제 탓에 서민들이 폭염 속에서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한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은 2013년 기준 78%이며 현재는 80%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에는 보급률 3%에 불과해 고소득층만의 사치품으로 취급되던 에어컨이 이젠 '생활필수품'이 된 셈이다. 누진제가 도입된 것은 '오일 쇼크'가 일어난 직후인 1974년. 에어컨 자체가 희귀했던 때 누진제가 에어컨이 생필품이 된 지금도 서민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같은 날 오후 5시 가양동의 임대아파트 단지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 동 120가구 중 81가구가 에어컨을 설치했지만 대부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김모(52)씨는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요금이 무서워 가능하면 더위를 견디려 한다"며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많이 사는 동네 사람들도 누진 요금을 걱정하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주민 이종수(52)씨는 잠자리에 드는 2~3시간만 에어컨을 켠다고 했다. 이씨는 "너무 더워서 온 가족 네 명이 거실에 나와 에어컨 아래에서 자는데, 스무 살 넘은 아이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보면 미안하다"고 했다.

중산층도 요금 폭탄을 우려하고 있다. 10일 오전 서울 잠실의 한 아파트 단지 공원에 주민 5명이 모여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김정숙(45)씨는 "작년 여름엔 두 아들이 집에 있을 때만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15만원이 나왔다"면서 "올해는 너무 더워 혼자 있을 때도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틀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이 정도 더위는 재해인데, '전기를 낭비하는 사람' 취급해 누진제를 적용하니 헛웃음만 나온다"고 했다.

서울 길음동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김현화(37)씨는 "집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아이들을 자주 몸을 담그게 한다"며 "한창 더운 시간에는 일부러 서점·카페 등에 가는데 그 비용도 만만찮다"고 했다. 이진희(38)씨는 "여덟 살 아이가 땀띠가 나서 전기 사용량을 계속 짐작해가면서 에어컨을 틀고 있다"고 했다.

"정부의 안이한 상황 인식이 더 밉다"는 시민들도 많았다. 신림동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한 주민은 "정부 관계자가 누진제를 없애면 부자들만 좋아지는 부자 감세 효과가 있다고 했던데, 내가 보기에 전기요금 누진제는 저소득층 증세 정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