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례없는 11.7배 누진율 안 고치면 '전기료 폭탄' 계속

11일 오후 3시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에서 지하철 이대역까지 이어지는 거리. 도로 양옆에 늘어선 상점 3곳 중 1곳은 문을 열어놓은 채 고객을 맞고 있었다. 바깥 기온은 섭씨 30도 중반을 넘나들었지만, 매장 면적 90㎡(약 27평)인 한 화장품 가게 내부 온도는 22~23도를 유지했다. 매장 안에 세워진 에어컨 2대는 온도 설정이 18도에 맞춰진 채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에어컨(사용전력 1.8㎾ 기준)을 하루 12시간 돌리면 일반 가정은 월 전기요금이 100만원을 넘지만 상점은 20만원밖에 나오지 않는다.

같은 시각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아파트 노인정은 텅 비어 있었다. 관리사무소 직원 김모(59)씨는 "노인정은 아파트 공동 전기를 쓰는데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는 주민들 항의 때문에 에어컨을 안 쓰다 보니 너무 더워 어르신들이 안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기(奇)현상은 이상한 국내 전기요금 체계 때문에 벌어진다. 가정용은 쓰는 양에 따라 ㎾h당 요금이 11.7배까지 높아지는 누진제의 적용을 받지만, 산업·일반(상업)·교육·농사용 등은 그렇지 않다. 월 100㎾h를 쓰다가 10배인 1000㎾h를 쓰면, 7300원이던 요금이 70배인 54만원으로 뛰는 '전기요금 폭탄' 현상을 유독 일반 가정만 겪는 이유다. 한국처럼 최저·최고 단위 요금 차이가 11.7배인 곳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거의 없다. 미국은 1.1배, 일본 1.4배, 대만 2.4배, 호주 1.3배 등에 불과하다.

◇전기료 누진 배율 3~4배로 줄여야

폭탄 요금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시민은 에어컨 사용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전세를 사는 회사원 김모(37)씨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 7월부터 되도록 사무실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다 퇴근한다. 맞벌이를 하는 남편과 학원에 다니는 아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8월 에어컨을 평소보다 좀 많이 틀었다가 한 달 전기요금으로 140만원을 낸 뒤 생긴 버릇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11일 누진제 완화 대책을 내놓은 다음에도 시민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는 "못 고친다고 며칠을 버티다가 대통령 한마디에 바로 바꾸는 걸 보니 우리 정부가 한심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누진제의 전면 개편을 주장한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6단계 구간을 3~4단계로 줄이고, 1단계와 6단계 배율 차를 3~4배까지 축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우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누진제를 당장 완화하는 게 어렵다면 단계적으로 시행해 충격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라며 "특히 11배가 넘는 누진율은 미국이나 일본 수준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당은 누진제 1~2단계를 1단계, 3~4단계를 3단계로 통합해 총 4단계로 축소하자고 주장한다.

정부는 누진제를 대폭 완화하면 전기 사용량이 늘어 '블랙아웃(대정전)'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불안해하지만, 에너지경제연구원 등 국책 연구기관들이 예측해본 결과, 가정용 사용량은 3~15% 증가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용이 전체 전력 사용량 중 13%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전체 증가율은 2% 미만이기 때문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문제는 주택용 요금 총액을 그대로 두고 누진제를 완화하면, 구간별 기본요금이 올라가 현재 최저 요금을 내는 저소득층 전기요금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재 취약 계층 에너지 사용료를 덜어주기 위해 도입한 '에너지 바우처'제를 확대하면 된다고 권고한다. 더불어민주당도 "계절별 차등 요금을 추진하고, 에너지 소외 계층에 '바우처' 제공을 늘리자"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