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로 우물 파기'… 예술은 영감 아닌 노력이다

다른 색들

오르한 파무크ㅣ이난아 옮김
민음사 | 660쪽ㅣ2만3000원

"작가라는 직업의 비밀은 어디서 오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영감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에 있다."

이 한 문장이 오르한 파무크(64)의 고백적 산문집을 Books로 이끌었다.

재능이 작가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파무크는 소설 쓰기가 자기 계발의 세계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한국의 소설가 김연수도 "소설은 영감이 아니라 계획과 실천 문제"라고 하지 않았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영감(靈感) 대신, 매일 하루 10시간씩을 책상에 앉아 쓰고 고치는 성실과 노력의 세계.

오르한 파무크의 '다른 색들'은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작가의 기품 있는 문학론이지만, 문학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 우리의 삶과 인생에도 작지 않은 교훈을 준다. 600쪽 넘는 이 두툼한 책에서, 우선 제9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부터 읽기를 제안한다.

터키 작가인 파무크는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표현을 썼다. 이슬람 문학의 걸작으로 '페르하트와 쉬린'이라는 작품이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여인 쉬린에게 도착하기 위해 산을 뚫어서 길을 내야 했던 페르하트. 핵심은 바늘로 우물을 파고, 산을 뚫어 길을 내는 인내와 끈기에 있다.

파무크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을 기억하시는지. 이 장편 소설에는 변함없는 열정으로 같은 말(馬)을 수없이 그리다 보니, 눈 감고도 아름다운 말을 그릴 수 있게 된 이란의 옛 세밀화가가 등장한다. 파무크는 이 부분을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묘사이면서, 나 자신의 삶에 대한 묘사"라고 했다. "내면에서 고양되는 이야기의 힘을 느끼려면, 책상 앞에 앉아 많은 세월을 끈기 있게 바치며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모든 직업과 각자의 삶에 두루 적용되는 가르침일 것이다.

번역된 파무크의 산문집이 처음은 아니다. 그가 태어난 도시 이름이자, 예술적 뿌리에 대한 고백인 전작 '이스탄불'이 있다. 하지만 '이스탄불'은 소설가가 아니라 화가를 꿈꿨던 자신의 유년 시절까지의 이야기였다. '다른 색들'은 그다음, 그러니까 소설가의 정체성과 그 여정에 대한 확인이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소재로 한 그의 문학론으로 이야기를 진척시켜보자. 파무크의 부친은 세상을 떠나기 2년쯤 전, 아들의 작업실을 찾아와 자신의 낡은 여행가방을 맡겼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이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자신의 글들을 읽어달라고. 아들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는 문학과 예술의 낭만성을 사랑했지만 외로움은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보다, 모임·농담·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 파무크는 계속 여행가방 열기를 주저한다. 그리고 묻는다. "행복은 무엇인가. 홀로 방에서 심오한 삶을 사는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와 그 속의 사람들과 같은 것을 믿거나 믿는 척하면서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인가. 각각의 삶은 예술의 독창성과 진정성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우리나라 독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파무크는 이 책에서 핏빛 이야기도 털어놓는다. 노벨상을 타기 한참 전, 작가 파무크는 터키 검찰에서 3년을 구형받은 적이 있다. 스위스 언론 인터뷰에서 나라 망신을 시켰다는 죄목이었다. 터키 역사, 아니 세계 역사에서도 몹시 치욕적인 역사 중 한 장면으로 꼽히는 1915년의 학살. 1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과 3만명의 쿠르드인을 숨지게 한 조국의 수치를 공개하자, 편협한 민주주의자들은 파무크를 몰아붙였다. 이 책의 제3부 '정치, 유럽 그리고 정체성 문제'에서 파무크가 공개하는 한 장면이다.

유럽이나 미국 작가에 비해, 터키의 작가인 파무크의 에세이는 아무래도 우리를 좀 더 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 많다.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하다 어느 순간 자기 나라보다 선진국의 문화예술을 부러워하며 더 많이 인용해야 했던 기억, 과잉 민족주의와 군사 쿠데타를 편의적으로 활용하는 정권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작가를 옥죄던 정치적 금기(禁忌)가 사라지자 일상에서 무력해졌던 예술가들의 고민까지.

작가뿐만 아니라 개인 역시 우리는 두 얼굴을 지니고 산다. 희생자가 가해자로, 해방의 영웅이 폭군으로, 절대주의자가 상대주의자로.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명제 그 자체일 뿐이라는 현대사회에서, 파무크의 글은 우리의 삶이 흑과 백의 단색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손목시계와 샌드위치, 보스포루스의 페리 등 일상을 소재로 한 편안한 산문부터, 도스토옙스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살만 루시디에 대한 존경과 존중, 그리고 '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순수박물관' 등 대표작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평가, 그리고 삶과 인생에 대한 빛나는 성찰까지, 한 작가의 영혼과 육체를 물들인 수많은 빛깔과 무늬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