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펼쳐진다, '유목민 예술가'가 그린 獨 현대미술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은 예술가들에겐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감의 근원이자 새로운 작업장이 됐다.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미개척지인 이곳으로 넘어와 개성 넘치는 예술을 선보였고, 이 에너지는 다시 독일 예술을 살찌웠다. 뉴욕과 런던을 이어 베를린은 현대미술의 배양지가 됐다.

미국 개념미술가 조지프 코수스(71), 영국 출신 조각가 토니 크랙(67), 네덜란드 회화 작가 알만도(86)…. 현대미술을 이끌어가는 이들 거장의 공통점은 1990년대 독일에 머문 적이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 영감받고, 독일의 예술을 풍성하게 한 이방인 작가 13명의 작품 50여점을 전시한 '아트스페이스 독일'전이 다음 달 25일까지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다. 문화외교의 일환으로 독일국제교류처(ifa)와 주한 독일 문화원이 기획한 순회전이다. 2001년 독일에서 첫 전시를 한 뒤 이스탄불, 시드니 등 20여개 도시를 돌며 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국적에 연연해 독일 미술을 한정 짓지 않고 독일을 거쳐 간 예술가까지 문화적으로 포용함으로써 문화 강국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장소를 옮겨다니며 활동한 '유목민 예술가'들이 독일의 문화와 특징을 직접적으로 반영시킨 작품을 전시한 건 아니다. 독일은 그들 작품의 보이지 않는 자양분으로 존재할 뿐이다. 작품은 주로 전쟁, 갈등, 문화 차이 등을 주제로 한 회화, 사진, 영상이다.

어렸을 적 나치 강제수용소 근처에서 자라며 전쟁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네덜란드 작가 알만도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작품 소재로 삼았다. 흰색 캔버스에 거칠고 강한 붓 터치로 검은색 깃발을 그린 '깃발 9-4-85'는 내면에 남아있는 투쟁과 갈등을 보여준다. '쌓아올리는 작품'으로 유명한 영국 조각가 토니 크랙은 플라스틱을 쌓아 우주선과 비슷한 형상을 만들어 인간과 물질, 자연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출신 작가 칸디스 브라이츠(43)는 쌍둥이에게 쌍둥이로 자라며 겪어온 고충을 각각 묻는다. 비슷하지만 다른 대답을 내놓는 두 사람을 보며 같은 사건이 개인에게 어떻게 다르게 비칠 수 있는지 들여다본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도 독일을 거쳐 간 작가다. 전시장엔 TV 위에 감시 카메라를 붙여 통제받는 미래 사회를 표현한 '촛불 TV'가 전시됐다.

한승주 서울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작가들의 출생지와 작품 세계는 모두 다르지만,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독일 현대미술이 발전한 시기와 비슷하다"며 "예술 유목민인 이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작품에 담아냈는지 관찰할 기회"라고 했다. (02)880-9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