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체조 요정' 51년 만에 받은 졸업장

"평생 한(恨)을 풀었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26일 오전 서울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2015 후기 학위 수여식(졸업식).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60대 여성이 학사모를 쓰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느 졸업생처럼 양손에 꽃다발을 한가득 안은 채였다. 최경희(54) 총장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이 졸업생은 최영숙(69·체육학)씨. 지난 1965년 이화여대에 입학한 지 51년 만에 졸업장을 받아 들었다. 올해 최고령 학부 졸업생이다.

최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에 출전했던 국가대표 체조 선수 출신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힐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았던 최씨는 다른 대학의 입학 제의를 뿌리치고 이화여대를 택했다. "오래전부터 '여자라면 이대'라고 생각했어요. 제 꿈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있었던 개교 80주년 행사에선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씨는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사랑'과 '공부'를 병행할 수 없게 한 이화여대의 학칙 때문이었다. 당시 이화여대엔 '결혼한 여성은 입학할 수 없다' '재학생이 결혼했을 땐 제적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른바 '금혼(禁婚) 학칙'이 있었다. 이른 결혼으로 여성의 학습권이 침해받는 걸 막자는 취지의 학칙이었다.

최씨는 4학년이던 1968년 같은 체조 국가대표 선수인 강수일(73)씨와 결혼했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학교는 최씨를 제적했다. 졸업까지 불과 8학점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최씨는 "당시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겠지'라는 심정이었다"며 "재일교포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니 공부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1969년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체조 요정'은 '엄마'가 됐다. 딸과 아들이 한 살 터울로 태어났고 딸은 자주 잔병치레를 했다. 최씨는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을 미루다 보니 아이들이 크고 점점 더 시간이 없어지더라"고 했다.

이화여대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학칙'이라는 비판에 2003년 금혼 학칙을 폐지했다. 일본에 살아 지난해에야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최씨는 바로 이대에 재입학 신청을 하고 가을부터 학교에 다녔다. 마침 최씨의 손녀(22)도 이화여대가 운영하는 외국어학당에 다니고 있었다. 손녀를 만나러 한국에 올 때마다 수업에 참석했고, 교수들은 만학도인 최씨를 배려해 시험 대신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학점을 인정해줬다.

이날 졸업장을 받은 최씨는 "체조를 하며 제가 받은 어떤 상보다 값지다"고 말했다. 50년 세월 내내 모교를 마음속에 품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씨는 "손녀뻘인 학생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부러 한국을 더 찾았다"며 "이제 누구를 만나도 '이화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