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가루 날리던 공장… 예술魂이 나부끼다

낡은 공장 천장에 지름 9m 빨간색 원형 천막이 매달렸다. 식탁보같이 접혀 있던 천막이 '윙윙' 모터가 돌 때마다 원심력 받아 활짝 펴져 양귀비꽃처럼 나부꼈다. 네덜란드 작가 조로 파이글의 설치 작품 'Poppy'. 천장의 오래된 나무 트러스트 구조를 캔버스 삼아 빨간 꽃이 폈다 지는 모습을 관람객들이 넋 놓고 바라봤다.

영상, 설치, 회화 작품이 곳곳에 걸린 이 건물은 반세기 가까이 쇳가루 폴폴 날리던 공장이었다. 세계 최대 특수 선재(線材) 회사인 고려제강이 1963년부터 2008년까지 현수교, 자동차 타이어 등에 들어가는 와이어로프 생산 기지로 썼던 부산 수영구 망미동의 '수영공장'이었다. 2008년 주변 지역이 주택 지대로 개발되면서 공장은 문을 닫게 됐다. 설비는 부산 정관과 경남 양산 공장으로 이전되고 폐공장은 창고로 쓰이다가 최근 'F1963'이란 이름의 복합 문화시설(1만650㎡·3220평)로 변신했다.

지난 3일 이곳이 예술 공간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을 주제로 이날 개막한 '2016 부산비엔날레'의 '프로젝트 2' 전시 무대로 데뷔했다. 올 부산비엔날레는 이곳과 부산시립미술관 두 곳에서 열린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선 한·중·일 3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 '프로젝트 1'과 학술 행사 '프로젝트 3'가 열린다.

세계 최고의 격년제 미술전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리는 아르세날레는 조선소를 전시장으로 바꾼 것이고,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화력발전소를 탈바꿈시킨 공간이다. 이처럼 산업 유산을 예술 무대로 바꾸는 건 해외에선 흔한 현상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오랜 건물을 재생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카페 같은 상업 공간으로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부산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미술 전시에 폐공장이 활용된 건 이례적이다.

비엔날레가 쏟아지는 요즘 'F1963'에서의 전시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다. 저마다 공들여 전시를 기획하지만 수용자인 관객 입장에서 보면 엇비슷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간이 주는 특별한 아우라에 예술을 결합한 시도는 훨씬 색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건축가 조병수의 리모델링 작업으로 재탄생한 공장은 원래 모습을 최대한 살렸다. 잔잔한 물결 형태의 연한 하늘색 타공 철판으로 감싼 외관을 제외하면 내부는 거의 그대로다. 여기에 23국 56팀 작가의 작품이 설치됐다. 관객들이 마이크에 대고 예술에 대해 말하는 션샤오민의 관객 참여형 작품 'Art History', VR(가상현실) 페인팅을 접목한 이이남의 '혼혈하는 지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전시됐다.

자동차 엔진 모양 작품을 선보인 장재록 작가는 "작가로서는 공간이 지닌 힘을 뛰어넘는 작품을 해야 하는 게 쉽지 않지만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공간이 생겨 반갑다" 고 말했다. 부산 지역 시장에서 구한 폐기물로 작품을 만든 미국 작가 시니크 스미스는 "고향 메릴랜드가 부산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데 바닷가 공장들이 어느 날 문을 닫고 예술 공간으로 재생됐다. 동서양에서 동시에 산업의 무대가 문화의 무대로 바뀌는 게 흥미롭다"고 했다.

고려제강을 설득해 이곳을 전시 무대로 활용한 윤재갑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은 "'천천히, 잘하자'는 고려제강의 기업 정신이 현대 예술에도 필요한 시점 아닌가 싶다"며 "전시가 좋다는 소문을 들으면 해외에서도 제 발로 찾아오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11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