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하게 그렸네,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고산자(古山子)'의 작가 박범신은 김정호를 가리켜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상과 계속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김정호는 조선시대의 가장 정확한 실측 지도로 평가받고 있는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다수의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전해져 오는 생존 시기도 추정일 뿐이고 그의 고향은 물론 본관, 신분조차도 여러 설로만 전해질 따름이다. 강우석 감독이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허구로 풀어낸 소설 '고산자'를 영화화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그의 스무 번째 영화이자 첫 사극이다. 지도보다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김정호의 정수(精髓)로 한 걸음 더 다가간다.

영화는 김정호(차승원)가 밟았던 조선의 땅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철쭉이 만개한 황매산, 얼어붙은 북한강, 일몰의 여수 여자만, 제주 송악산에서 바라본 마라도 등 사계절의 풍광을 대사 한마디 없이 담아내기만 하고 마지막을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는 백두산 천지로 마무리한다. 강우석 감독이 "CG 장면이 아니다"라고 수차례 강조해야 했을 정도로 유려하고 선연한 장면이다. 영화 제목이 나올 때까지 5분 내외로 나오는 이 장면은 조금 더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잔상이 깊이 남는다.

김정호가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부분은 영화 시작 이후 거의 등장하지 않고, 지도 제작을 거의 다 마쳤을 때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가 지도를 그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생략하는 대신, 그가 왜 지도를 그리는지에 중점을 맞춘다. 지도를 노리는 흥선대원군과 권세가와 갈등을 빚는 장면을 차곡차곡 쌓듯이 보여주면서 김정호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지도를 만든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김정호가 땅을 꾹꾹 밟고 다니며 지도를 그린 것처럼 이 영화도 잔재주 없이, 우직하게 연출이 됐다. 그래선지 파인 곳 하나 없이 잘 닦인 도로 위를 여유롭게 운전하는 것처럼 모나거나 튀는 구석이 없다.

감독이 뚝심을 얻은 대신 개성을 놓쳤다. 김정호와 딸 순실(남지현)의 관계나 김정호와 조력자 바우(김인권)의 관계가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펼쳐지고,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하지만 평이한 서사보다 아쉬운 것은 김정호가 갈등 상황에 놓이기 전에 나오는 희극적인 장면이다. 지도를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비유하거나 김정호를 연기한 차승원이 '나도 한 요리하는데, 삼시세끼도 다 해줄 수 있다'는 대사를 한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면인 건 분명한데, 입꼬리가 쉬이 올라가질 않을 정도로 어색하다. '삼시세끼'로 친근하고 재미있는 이미지를 갖게 된 차승원과 코믹한 연기를 주로 선보였던 김인권의 합(合)이 문제가 아니다. '투캅스'나 '공공의 적'에서 빛났던 말장난이나 만담 같은 유머들은 이제 힘을 잃은 것이다. 더 세련되고 은근한 유머에 반응하는 요즘 관객들의 취향에 맞을지 의문이다.

영화 제목이 '고산자, 대동여지도'지만, 영화의 방점은 지도가 아닌 사람에게 찍혀 있다. 김정호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좋은 것을 사람들과 나누려는 마음을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좋아하는 일에 미친 듯이 몰입을 하는 '조선시대의 오타쿠'에 관한 영화로 봐도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강우석 감독의 첫 사극에서 '지금 우리가 원하는 인간'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