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은 유일한 당대의 기록… 생생한 고려의 속살"

"'일본서기'는 이미 19세기에 영어로 번역이 됐는데 한국학 서적의 번역은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번역의 질을 높이려면 장기적 안목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인력이 줄어들고 있어요."

고문헌과 역사 서적으로 둘러싸인 연구실에서 벨기에 출신 학자가 조심스럽게 우려했다. 셈 베르메르슈(48)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겸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이다. 그는 12세기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의 견문록 '고려도경'을 8년 작업 끝에 영어로 번역했다. 지난 5월 하와이대 출판사에서 출간된 영문판의 제목은 'A Chinese Traveler in Medieval Korea'. 서울 관악구 서울대 규장각의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고유명사를 적절한 영어로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고 입을 열었다.

고려도경은 1123년 대규모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이 귀국 후 편찬한 책이다. 송나라 황제 휘종으로부터 고려에 대한 정보를 수집,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고 쓴 일종의 '보고서'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고려 당대에 직접 보고 쓴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 초기에 쓴 책이거든요. 40개의 짧은 챕터로 구성됐는데 오늘날 저장성 닝보에서 배를 띄워 흑산도, 위도, 영종도 등을 거쳐 개성에 도착하는 과정, 어떤 문으로 들어가고 누굴 만났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했어요. 고려의 속살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지요."

그는 "다만 서긍은 당시 요나라, 금나라와의 전쟁으로 위기에 봉착한 송나라가 고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 파견한 사절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고려를 칭찬하는 느낌도 있고 은근히 비하하는 표현도 적지 않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고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한다. 시냇물에 모여 남녀 구별 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벌거벗는데 이런 일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벨기에에서 중국학을 전공한 그는 1991년 중국 안후이성 주화산(九華山)을 찾았다가 절에서 모시는 지장보살상(像)이 신라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라는 설화를 듣고 한국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2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왔고 이후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서 고려불교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문과 한글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해외 학자가 거의 없고 갈수록 줄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고려나 신라사를 전공하면 취직이 안 되기 때문"이라며 "한류나 국제관계학 쪽엔 학생들이 늘고 있지만 한국사는 거의 없고 그나마도 조선 후기에 몰려 있다"고 우려했다.

해외 한국학자들과 국내 한국인 학자들의 제일 큰 차이는 '시야'라고 했다. "해외 나가면 '고려가 뭐야?'란 질문을 받는데 국내에선 고려 초기에 대한 책을 써도 너무 넓다고 비판해요. '고려 초기의 왕사제도' 하는 식의 미시(微視) 연구만 있죠. 해외에 한국학을 제대로 알리려면 여러 수준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전문적인 연구 논문 아니면 대중서일 뿐 중간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