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대나무숲 속에 먼저 찾아와 있었다. '쏴~아'하는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댓잎이 아스스 떨다 발 앞에 툭 떨어졌다. 지난 5일 죽녹원(竹綠苑·전남 담양군 담양읍)을 찾은 김명석(40)씨 일행은 "죽림욕을 하러 경주에서 왔다"면서 "청청한 대나무숲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심신이 치유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느리게 걷는 '힐링 길'
죽녹원은 죽향(竹鄕)으로 이름난 담양에서도 대표적인 명소로 꼽힌다. 지난해 유료 탐방객이 150만명이었다. 4~5월 봄에 이어 또 다른 성수기인 9~10월 가을엔 주말 하루 1만6000명이 찾는다.
죽녹원 34만1900㎡ 중 18만3000㎡엔 왕대·분죽·맹종죽 등 10여 종의 다양한 대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평균 키가 10m인 대나무들 사이로 8개 주제의 산책로가 놓여 있다.
담양군은 2003년 5월에 개인 소유 대나무밭 17만2600㎡를 44억원에 사들이면서 죽녹원 조성에 나섰다. 당시 주민들은 "또 대나무냐"며 냉소적인 반응 일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형식 담양군수는 "죽제품만으론 미래가 없다. 관광에 해답이 있다"며 군민들을 설득했다. 죽녹원은 2005년 3월 개장 이후 힐링 여행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5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로 죽녹원을 선정했다.
담양의 또 다른 상징은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해마다 60만명이 찾는 이 길은 2000년 국도 확장 공사 때 없어질 뻔하다 살아남았다. 이렇게 보존된 2.1㎞ 구간에 메타세쿼이아 487그루가 서식하고 있다. 2015년 전남도 산림문화자산 1호로 지정됐다. 나무의 평균 높이는 30m에 달한다. 학계에선 메타세쿼이아는 300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 이후 멸종된 것으로 보고됐으나, 1941년 중국에서 4000여 그루가 극적으로 발견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길을 가다 만나는 '작은 유럽'
메타세쿼이아 길옆엔 유럽의 예쁜 마을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메타 프로방스'가 조성 중이다. 메타세쿼이아 길의 '메타'와 프랑스 동남부의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인 '프로방스'를 따서 만들었다.
담양군이 민간 사업자와 함께 유럽풍 마을로 조성하고 있는 메타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야경. 메타 프로방스는 죽림(竹林)과 메타세쿼이아 등 나무로 이름났던 담양의 새 관광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김영근 기자·담양군
농지와 임야였던 담양읍 학동리 13만5000여㎡에 주황색 지붕과 알록달록한 벽이 이국적인 펜션·식당·카페 56개 동이 들어서 있다. 김찬주 담양군 투자유치단 주무관은 "요즘은 메타세쿼이아 길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면서 "유럽보다 더 유럽다운 마을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 사업자가 사업비 670억원을 투입한 이 유럽풍 마을은 2014년 7월 부분 개장했다. 내년 말 펜션과 가족호텔(57실), 상가 등 전체 104개 동을 갖춰 준공할 예정이다.
지난해 200만명이 이곳을 찾은 것으로 추정된다. 담양 인구(4만8000명)의 41배였다. 주말에는 조용한 농촌의 정서와 유럽의 낭만을 체험하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대부분의 식당과 카페가 만원이다.
◇누정(樓亭)에 흐르는 풍류
메타 프로방스와 죽녹원 사이 제방으로 가면 300년 고목들을 만난다. 관방제림(官防提林)이다. 영산강 최상류 담양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선 인조 28년(1648) 담양부사 성이성(成以性)이 둑을 쌓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1.6㎞ 길이의 제방은 숲길이기도 하다. 팽나무·느티나무·푸조나무·벚나무 등 15종 176그루가 1991년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오승택(44·목포 산정동)씨는 "'걸으면서 가장 풍요로운 생각을 얻게 된다'는 말이 있다"며 "관방제림 흙길을 걸을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정리된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담양에 내려와 누각과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삼았다. 소쇄원·면앙정·환벽당·서하당·식영정·송강정 등 시가문학의 산실로 꼽히는 조선시대 누정 39곳이 곳곳에 퍼져 있다. 자연히 가사(歌辭) 문학이 발달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가사 문학관이 있을 정도다.
최형식 군수는 "2018년이면 담양이라는 지명이 사용된 지 1000년이 된다"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자원을 바탕으로 '문화·생태·관광의 고장'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