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寂滅寶宮)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인데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직접 봉안하였다는 통도사와 상원사, 봉정암, 법흥사, 그리고 정암사를 5대 적멸보궁으로 손꼽는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 시대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며,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5대 적멸보궁에 용연사와 도리사, 건봉사를 합쳐 8대 적멸보궁이라고도 하는데 그 첫 번째 이야기는 금강산 건봉사이다.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건봉사는 건봉산 아래에 있건마는 '금강산 건봉사'라고 한다. 기왕이면 더 크고 유명한 산 이름을 빌리고 싶은 심정에서 금강산을 불러왔으리라고 보이나, 건봉산 줄기가 금강산과 이어져 있으니 꼭 틀린 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야박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수용하기로 한다.
아무튼 조선 4대 사찰, 또는 금강산 4대 사찰로 불리던 대찰(大刹) 건봉사는 1878년 대화재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휴전 후 민통선(민간인 통제선)에 갇힌 채 자칫 잊혀버릴 뻔 한 절집이다. 한때는 조선 31 본산의 하나로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 등을 말사로 두었을 만큼 큰 절집이었으나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1980년대 후반 민통선 출입을 개방하여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이후 왕성한 발굴 및 복원작업을 진행 중이며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여 사적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건봉사 창건과 염불만일회
건봉사는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다는데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아도화상에 대하여는 역사서마다 또는 전해오는 이야기마다 조금씩 달라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신라 법흥왕 때보다는 한참 앞선 시대 사람이므로 사실과는 맞지 않는 창건설화이다. 다만 우리나라 절집들의 창건설화 역시 유명 고승들과 연계시키려는 경향이 있어 이 역시 그러한 유형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 758년에 발진 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스님 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라고 한다.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31명의 스님과 1,820인의 신도들이 참여하여 27년 5개월 동안 산문을 나서지 않고 오직 염불삼매에 빠져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태어나 성불하기를 서원하고 결사하는 것을 일컫는데 120인은 철 따라 의복을 보시하고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수행자들을 봉양하였다.
787년 염불만일을 회향하는 날 서쪽 하늘이 열리고 31인의 염불행자들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날아 올랐다고 한다.1.5킬로 지점에서 육신을 버리고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로 바로 왕생하였다. 매미 허물 벗듯이 육신의 옷을 벗고 극락에 왕생한 터에 세운 부도탑이 현재의 건봉사 등공탑이다. 그 뒤 염불만일회를 후원했던 1,820인도 차례로 극락왕생하여 건봉사는 아미타도량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고려말에 이르러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가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 '건봉사'가 되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니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으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 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호국의 본거지였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된 까닭이다.
내친 김에 등공대(騰空臺)에 올라가 보려 했는데 왕복 40분이 걸리는 산길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10명 이상 단체로 가야 하고, 오후 4시 이전에 가야 하며, 사전에 관할 군부대에 통보 후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데 민통선內 산행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부득이 등공대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사명대사가 의병승들에게 먹여 질병을 낫게 했다는 냉천약수 장군샘물만 한 모금 마신 후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 건물인 만일염불원(萬日念佛院)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치아사리를 친견하였다.
만일염불회 결과 극락으로 올라간 현장 등공대는 오르지 못하고 부처님 치아사리를 친견한 후 다시 능파교를 건너와 가장 위쪽에 있는 적멸보궁을 향하였다. 이곳에 사리 3과를 모셔 건봉사가 8대 적멸보궁이 된 것인데 적멸보궁 건물이나 뒤편의 사리탑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단출하였다.
어쩌면 현재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에 있는 절 건봉사. 한때는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 등을 말사로 두고 조선 31본 사의 위용을 자랑하던 건봉사는 화재와 전란으로 연거푸 전소하고 다시 짓고를 반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또 한동안은 민간인의 접근이 어려워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이제는 계속된 중창불사로 사격(寺格)을 높이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인데 생각보다 여기저기에 일제의 잔재가 묻어 있다는 사실이 또한 의아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있으니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게다가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라는 쉽지 않은 서원 결사의 역사는 물론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극락으로 올라갔다는 등공대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전설 같은 이야기로 건봉사의 설화가 아니라 현실로 존재하는 유적이다. 다음에는 반드시 답사해보고 싶다.
또한 사명대사가 의병승군을 일으킨 호국사찰로 일본에서 찾아온 부처님 진신사리, 그것도 세계적으로 희귀하다는 치아사리를 이곳에 모셔 8대 적멸보궁이 되었다는 건봉사 답사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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