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서도 쫓기는데… 게임에선 느긋할래요

깊은 바닷속 연보랏빛 산호석이 홀로 우두커니 서 있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외롭다"고 말한다. 산호석은 천천히 '생명력'을 뿜어내고, '생명력'이 커질수록 작은 열대어부터 청새치, 고래상어까지 크고 작은 해양 동식물이 생겨난다. 이들은 산호석 주변에 자리 잡고 친구가 되어준다. 붐비는 바다 마을을 바라보며 산호석은 흐뭇하게 웃는다. 모바일게임 '어비스리움'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PC나 모바일 게임이라고 하면 대개 폭력적·자극적인 전투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요즘 그와는 정반대 스타일의 게임이 20~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복잡한 조작을 대폭 줄이는 대신 서정적인 그래픽과 음악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힐링 게임'이다. 빠른 전개, 남들과의 치열한 경쟁은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재미로 여겨져 왔지만, 경쟁 사회에 지친 젊은이들이 "게임에서까지 쫓기고 싶지 않다"며 휴식과 위로를 찾는 것이다.

산호초에게 집과 친구를 만들어주며 심해(深海) 세계를 꾸려나가는 '어비스리움'은 지난 6월 출시돼 다운로드 100만건을 돌파했다. 파스텔톤 화면에 피아노 배경 음악이 편안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직장인 정수인(32)씨는 퇴근 후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이 게임을 시작한다. 실제 게임은 하지 않고 잠들기 전까지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도 많다고 한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해서 다운받았는데 처음엔 지겨웠지만 이제는 끊을 수가 없다"며 "쓸쓸할 때 게임 속 산호석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보면 내게도 친구가 생긴 것처럼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감수성을 강조하는 게임은 전 세계에서 꾸준히 등장해왔지만 국내에선 1~2년 전부터 부쩍 인기를 끌고 있다. 특별한 조작 없이도 진행되는 '아이들(idle·게으른) 게임' 스타일이 많다. 인생사를 게임 속에서 풀어내 색다른 감동을 추구하는 종류도 사랑받는다.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억을 조작하는 PC게임 '투더문', 개발자 본인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당했던 경험을 토대로 소년이 괴물(아버지)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게임으로 만든 PC게임 '파포앤요'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1월 출시된 모바일 게임 '세계수 키우기'는 새싹을 거대한 나무로 가꾸면서 피폐했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복원하는 내용이다.

직장인 한예은(25)씨는 "동화 같은 그래픽, 영화처럼 아름다운 스토리에 푹 빠졌다"며 "여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고 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에게 힐링 게임을 추천했다는 대학생 김원(25)씨는 "그래픽과 음악이 한편의 애니메이션처럼 어우러져 동생도 무척 좋아한다"며 "늘 바쁘고 할 일도 많은데 게임하면서까지 서두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경쟁과 결투, '만렙(최종 레벨)' 달성 등 결과를 중시하는 기존 게임에 피로와 식상함을 느낀 사용자들이 신선한 체험을 제공하는 '힐링 게임'을 찾는 것으로 분석된다. '세계수 키우기' 개발자 정선교씨는 "싸우고 쳐부수는 자극적 게임에서 벗어나 귀와 눈을 평온하게 해주고 마음을 달래주는 게임을 만들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초고속화 사회에서 압박감과 불안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휴식과 위로에 대한 욕구를 게임으로 해소한다는 설명이다. 게임 전문가 양성 기관인 한국IT전문학교 게임스쿨학부의 홍성관 교수(게임심리학)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꿈꾸는 듯한 편안함, 행복에 대한 욕구를 지닌 사용자가 게임 그래픽을 통해 일종의 '트랜스 상태(무아지경)'를 경험하게 된다"며 "게임을 통해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는 등 심리적 치유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