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쌍둥이 형제, 시와 랩이 만나다

래퍼 베이식(30)과 시인 박준(33)이 한 무대에 오른다. 베이식이 비트에 맞춰 박준의 시(詩)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를 개사해 읊는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아…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해." 1절은 종결어미만 반말 투로 바꿔 쓴 가사, 2절부터는 래퍼가 직접 쓴 자전적 랩 가사가 쏟아진다. 랩이 끝난 뒤 이어진 두 남자의 대담. "처음 해본 건데 재밌네요."

3일 KBS 라디오 쿨FM이 기획한 '힙합시(詩)대'에 출연한 두 사람이 20여 분에 걸쳐 한 몸이 된 시와 랩을 분출하자, 서울 서교동 공연장에 모인 관중 수백 명이 열광적인 환호를 쏟아냈다. 공연을 연출한 현인철 PD는 "래퍼를 '거리의 시인'이라 부르지 않나. 랩엔 문학성, 현대 시엔 소리를 회복해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은 한글날인 9일 라디오 다큐멘터리로도 방송된다.

시와 랩의 화학작용이 거세지고 있다. 시가 지닌 본연의 깊이와 랩의 말재미가 결합해 대중적인 음유(吟遊)를 향하고 있는 것. 지난 2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파주 북소리' 축제에선 윤석정(39) 시인과 래퍼 피티컬(PTycal·35) 등이 결성한 3인조 '트루베르'가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보여줬다. 트루베르는 프랑스어로 '음유시인'이라는 뜻으로,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거나 지역 시인들과 함께 합동 공연을 펼치고 있는 팀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용악 '오랑캐꽃' 등 외재율이 익숙한 시 외에 안현미 시인의 '어항골목' 같은 산문시도 랩으로 재탄생했다. 윤 시인은 "완전히 산문시인 경우에도 내재된 운율이 있어 랩이 가능하다"면서 "판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시 원문을 훼손하지 않고 100% 그대로 전달한다는 이 팀의 원칙은 팀 결성 이유와 맞닿아 있다. "공연을 위해 시를 빌려오는 게 아니에요. 시를 들려주기 위해 노래를 만드는 겁니다."

외국에선 아예 시인이 래퍼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랩 포엠(Rap poem)'의 가사를 올려놓은 웹사이트도 상당수다. 자신의 부나 명예를 과시하는 갱스터랩에서 탈피해 다채로운 주제를 각운으로 살려 문장에 리듬을 부여하는 작법이다. 시와 랩의 중간 형태라고 볼 수 있는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 역시 활발하다. 장문의 자작시에 리듬과 몸짓을 넣어 역동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낭독 공연을 일컫는다. 국내에서도 김경주(40) 시인과 래퍼 MC메타(45) 등이 2014년 결성한 '포에틱 저스티스'가 가장 활발히 이 '낭독의 재구성'을 해나가고 있다.

2014년 '현대문학' 9월호를 통해 '랩 동요를 위한 12편의 시'를 발표한 최승호(62) 시인은 지난해 작곡가 뮤지(35)와 함께 '랩 동요집'을 발매하기도 했다. '와라 와라 갯 갯'(갯마을) '벌벌 떠는 벌레 먹자'(딱따구리) 등 동어 반복의 재미와 빠른 템포를 염두에 두고 썼다. 최씨는 "2013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제 시낭송 축제에 참석했는데 젊은 시인들 중에 래퍼가 많았다"면서 "점차 음유시인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