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폭에 등장인물만 5000명

시장에서 물건 파는 장사꾼, 소리치는 뱃사람, 말 탄 사람, 다리 건너는 아이까지 이목구비가 생생하다. 두루마리를 펼치니 무려 12.4m. 사냥, 유람, 행상, 혼례, 놀이, 싸움 같은 중국 청나라 때 소주(蘇州)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담겼다. 대추씨보다 작은 인물 약 4800명, 배 300여척, 건물 2600여개, 다리 40여개가 그림에 빼곡하다. 고개를 파묻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밀한 묘사를 훑어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청 황제 건륭제(재위 1735~1795)의 명으로 소주 출신 궁정화가 서양(徐揚·1712~약1779)이 그린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다.

우리 국보에 해당하는 중국 1급 문화재 '고소번화도'와 '청명상하도'가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전시장에 놓였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영훈)이 5일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는 특별전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이다. 국내에서 두 작품을 동시에 볼 기회가 흔치 않은 데다 두 작품은 23일까지 단 19일만 진본을 공개하기 때문에 서두르는 게 좋겠다.

'청명상하도'는 중국 도시의 풍부한 물자와 활력 넘치는 풍경을 그린 대표적 주제. 북송대 화가 장택단이 처음 그린 '청명상하도'(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이후 명·청대 중국 강남 지방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번에 랴오닝성박물관에서 빌려온 작품은 명대 강남의 대도시였던 소주에서 제작한 것으로 각종 상점들과 군중이 붐비는 도심을 생생히 재현했다. 권혜은 학예연구사는 "나란히 전시된 두 작품은 각각 명·청대 가장 번성했던 도시를 그렸다. 물자가 풍부하고 활력이 넘치는 그림 속 도시는 태평성대를 꿈꾸던 국가의 이상향"이라고 했다.

도시 그림에 대한 관심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태평성시도'는 섬세한 필치로 가상의 이상 도시를 그린 병풍 그림. 도로에는 수레와 인파가 가득하고 시장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담뱃잎 썰기, 서화 감상, 베 짜기, 기와 올리기 같은 우리 고유의 풍습도 엿볼 수 있다. 일본 교토의 이상적 풍경을 그린 '낙중낙외도'까지 한 방에 걸려 동아시아 도시의 유토피아가 펼쳐진다.

18세기 조선 후기부터 1930년대까지 우리 미술을 도시 문화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작품 204건 373점을 전시했다.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나란히 비교 감상하는 재미도 놓치지 마시길. 11월 23일까지. 관람료 성인 5000원. (02)1688-0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