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태풍' 뚫고… 마침내 펼쳐진 영화의 바다

언제 태풍이 왔었느냐며 시치미를 떼는 듯했다. 여러 곡절 끝에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막을 올린 6일, 개막식장인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의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티켓 매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과, 스타를 보기 위해 레드카펫 앞에 미리 자리 잡고 기다리는 열성팬들의 모습도 예전과 큰 차이 없었다. 전날 태풍 여파로 해운대 해변 '비프(BIFF) 빌리지'에서 계획된 행사가 모두 영화의 전당 광장으로 옮겨진 것을 빼면 영화제 진행은 순조로웠다. 이날 오전 개막식 준비와 리허설로 눈코 뜰 새 없었던 김동호(79) 영화제 이사장은 "참 많이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두 태풍' 뚫고 다시 영화의 바다로

해운대를 물바다로 만든 태풍 차바 이전, 부산영화제는 또 하나의 태풍을 통과했다. 2014년 영화제 '다이빙벨' 상영 파문 이후 부산시와 영화계 사이에 벌어진 영화제 독립성과 자율성 침해 공방이라는 태풍이다. 9개 주요 영화인 단체로 구성된 '영화인 비대위'가 지난 4월 영화제 보이콧 결정을 내렸을 때는 개최 자체가 불투명해 보였다. 2015년 관객 23만명이 찾아와 2172억원의 경제 효과(대외경제정책연 추산)를 올렸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축제로 자리 잡은 부산영화제가 처음 맞는 좌초 위기였다.

하지만 5월 초 영화제를 처음 만들고 이끌었던 주역이며 영화계에서 널리 존경받는 김동호 이사장(당시 조직위원장)이 '구원투수'로 투입되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7월 진통 끝에 영화제 정관을 개정해 서병수(65) 부산시장이 당연직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났고, 8월 초엔 영화인 비대위 9개 참여 단체 중 4개가 보이콧 철회, 1개가 입장 유보 결정을 내렸다. 단체별 입장 차가 선명히 드러난 '내분'이었지만, 국내 영화인들의 영화제 참석 길은 열린 것이다. 올해 상영작은 69개국 301편으로, 2014년 79개국 312편, 2015년 75개국 302편에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 영화제 사정에 밝은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해외 영화인들은 영화제 참석 자체를 영화제에 대한 지지 표현으로 여긴다. 해외 게스트 숫자는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배우 설경구와 한효주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에는 감독 임권택·곽경택·김기덕, 배우 강신성일·안성기·와타나베 겐 등 초청 영화인 160여 명이 레드카펫을 밟았고, 관객 5000여 명이 참석했다. 개막식 참석 영화인 숫자는 예년에 비해 40여 명 줄었다.

◇개막작 장률 감독의 '춘몽'

올해 개막작은 '이리'(2008) '두만강'(2009) 등을 만든 장률 감독의 신작 '춘몽'. 5년 만의 한국 영화 개막작이다. 퍼렇게 날 선 안개 같았던 장률의 영화는 박해일과 신민아 주연의 '경주'(2014) 이후 쉽고 따뜻해지고 있다. 양익준('똥파리'), 윤종빈('용서받지 못한 자'), 박정범('무산일기') 등 3명의 감독 겸업 배우가 각각 자신의 이름 그대로 자기 영화 속 인물들과 유사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흔한 동네 건달과 바보, 월급 떼인 탈북 청년이지만, 세 남자는 모두 수색역 앞 서민 동네 '고향 주막' 주인 여자 예리(한예리)에게 푹 빠져 있다. 홍상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설정이지만 질척이지 않고 담백하다. 굳이 세상을 이기려 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에 짓밟히려 하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봄날 꿈결처럼 흘러간다. 장률 감독은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보듬는 따뜻한 영화이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