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0.11 14:16

시계를 보니 밤 10시다. 잠시 망설이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휴대폰을 챙겨 든다. 운동화를 신고 발걸음도 가볍게 아파트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폭신한 운동화 바닥이 느껴져 걸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맑은 공기가 생각이 날 때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아파트 옥상에 오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아파트에서 이 삼 분이면 닿는 야산 둘레 길도 이 밤엔 내 관심을 그리 끌지 못한다.

아파트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달빛이 눈 부시다. 하현달이 밤하늘에 떠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별들이 떠서 나를 반긴다. 오늘은 공기가 맑아 북두칠성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둠이 눈에 익자 카시오페이아 자리도 눈에 들어온다. 애들 말로 대박이다. 한 줄기 흘러가는 바람 줄기 사이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텃밭 상자 밑에 어느 해인가부터 살기 시작하더니 가을밤이면 어김없이 울어 나를 감격게 한다.

밤중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 산책을 하는 버릇은 아주 오래되었다. 지인들에게도 꽤 알려진 사실이다. 가끔 지인들 전화를 받으면 뭐하냐는 질문에 아파트 옥상에서 산책한다고 한다. 처음엔 열이면 열 깔깔대고 웃었다. 웬 달밤에 체조느냐고 하던 지인들도 요즘은 아파트 옥상을 개방하는 내 아파트를 부러워한다. 이 가을밤에 가장 안전한 곳에서 달 보며 별 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 서울 하늘 밑에 몇이나 있겠는가.

유년 시절부터 유난히 밤을 좋아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도 좋고 아스라한 곳에서부터 내려오는 별빛도 좋았다. 여름밤에 우는 개구리 소리나, 가을밤에 우는 귀뚜라미 소리가 좋았다. 언제부터 밤을 좋아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밤 산책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이 아파트에 이사 오고 나서부터이다. 아내로 엄마로 직장생활로 바빴던 탓에 뚜렷한 운동도 할 수 없었다. 걷기 운동은 내겐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였다.

결혼을 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사랑하나 믿고, 달랑 제 몸 하나밖에 없는 남자를 따라나섰던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싶은 시절. 서울 외대 부근의 산동네에서 신혼살림은 시작됐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았던 시절. 달동네에서 내려다보는 밤 풍경은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사는 게 각박했던 그 시절을 포근히 감싸 안는 마력(魔力)을 부렸다. 힘든 신혼생활을 견디게 해 준 힘이었다. 그리고 잊었다.

그 잊었던 밤을 이 아파트에 이사 와서 찾았다. 저층 아파트라 아파트 옥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한밤중, 아파트 옥상에 오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야산의 오솔길들이 가로등 불빛을 따라 보인다. 때로는 어깨를 맞대고 오르는 정다운 연인들도 보인다. 오늘같이 운수 좋은 날은 밤바람을 맞으며 북두칠성을 만나고 은하수를 만난다. 이런 날은 심사가 꼬였던 일들도 순식간에 풀리고 만다.

지금 사는 아파트를 이렇듯 좋아하는 이유는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야산 때문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작은 야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호사를 누리게 한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호사를 어디서 누리랴. 맘 내키면 언제나 저 숲으로 들어가 숲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이곳. 바람을 만나고 새소리를 만나고 함박눈이 춤을 추는 이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끔은 사진을 찍는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그 풍경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 사람들은 말한다. 도대체 서울 한 복판에 그런 곳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곳에서 나는 밤을 즐긴다. 밤을 온전히 즐기기엔 서울의 밤은 불안하다. 어디 그뿐인가. 산을 오르는 것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가 멀다고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 요즘이다. 그런 요즘 생활에서 마음 놓고 밤을 즐길 수 있는 이곳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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