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과 원고료에 움직이는 '스토리텔링 애니멀'

미친놈들의 서사. 깡패는 무식하게 완력을 휘두르고, 매춘부는 돈과 마약의 위력에 휩쓸리고, 사이비 자연인은 신비와 희망을 위조한다. 이름도 소똥('골짜기의 백합')이거나 똥깐('조동관 약전')이다.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인간 군상의 향연. "매번 왜 이런 인간들만 쓰냐고 하는데, 쓸 얘기가 넘쳐나잖아요. 밑바닥부터 하늘까지 올라가 본, 온갖 주름과 굴곡을 지닌 인간들. 양면성과 이중성을 보여주는 인간들." 새 단편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로 돌아온 소설가 성석제(56)가 말했다.

표제작의 제목은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구절에서 빌려왔다.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의 고어(古語)다. 소재는 동성애. 가난뱅이 주제에 마음 씀씀이 좋던 중학교 동창이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고, 훗날 프랑스에서 성공한 화가가 돼 금발의 남자 친구와 귀국한다는 줄거리다. 이번 단편집과 함께 20년 전 작품을 추려 동시 출간된 초기 단편집 '첫사랑' 역시 남학교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적 냄새를 풍긴다.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지만 결국 약자에 대한 얘기예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 편견에 대해 썼어요." 소설의 마지막, 노래방에 마주 앉은 친구는 무대에서 엉망진창으로 노래하는 애인을 두고 말한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결국 내 사랑인데 어쩌겠니.' 주인공은 되묻는다. '사랑이야? 사람이야?' 작가가 부연했다. "주인공이 가는귀가 어두워요. 그리고 그 두 단어 자체를 꼭 구분해야 하는 건지 되묻고 싶기도 했고."

올해로 등단 30주년. 단편집 제일 앞에 수록된 '블랙박스'엔 작가의 고뇌가 묻어 있다. 도저히 소설이 써지지 않자 주인공은 자조한다. '나이가 들면… 나도 모르게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소름이 끼친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소설, 문학이 이런 것이었나 생각하면 자괴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거의 모든 작가가 이런 생각 해봤을 거예요.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고 싶은 마음. 문학에선 만년작이 나오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인간의 여러 기능 중 언어력이 제일 먼저 쇠퇴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도 가끔 수혈을 받는다. "주로 자연에서 힘을 얻어요. 자연은 늘 젊으니까요." 지난 5월엔 아이슬란드에 기(氣)를 받으러 갔다. 도착 첫날, 거무스름한 대지의 기운을 느끼는 순간 그는 외치고 말았다. "아, 이제 집에 가도 되겠다."

성석제 소설을 대표하는 건 해학과 힘찬 수다다. 설사약처럼 내부를 쏟아내는 이야기가 '스크루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려 박아버리듯 홍콩으로 보내버리는' 쾌감. 문학평론가 노태훈이 성씨를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라 명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른바 '노가리'라고 하죠. 묘사보단 이야기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이런 부류의 작가는 미래를 두려워할 줄 몰라요. 소재가 다 떨어져도 다 쏟아내는 거예요." 그러니 간첩으로 몰려 인생이 파탄 난 한 남자를 그린 '매달리다' 등의 진지함은 의외일 수 있다. "청탁받을 때 분위기에 따라 소설이 달라지긴 하지만… 사람이 어디 가나요?"

그는 시인이다. 1986년 월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게 된 것도 기형도 등 친구 시인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다 1994년 산문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인생의 경로가 틀어졌다. "출판사 직원이 '소설'이라고 홍보해야 더 잘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소설' 딱지를 붙이고 출간하니깐, 턱 하니 소설 청탁이 오데요." 이후 계속 소설 청탁이 들어왔고, 소설가가 됐다.

그러니 그를 움직이는 건 청탁과 원고료다. 소설은 노동이며, 동력은 영감이 아니라 땀이다. "청탁이 오면, 몸을 만들죠. 자학에 가깝게." 체력을 키우는 게 아니다. "등산을 하든 자전거를 타든 몸에 든 쓸데없는 잡스러운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요. 자판을 두드릴 힘밖에 안 남을 때까지." 차기작은 99% 사실에 근접한 소설로 구상 중이다. "기왕 '애니멀' 얘기도 들었으니 '동물의 왕국' 같은 거나 써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