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 지진 사이렌 울려도 휴대폰 보며 쇼핑

전국적으로 지진 대피 민방위 훈련이 실시된 19일 오후 2시 5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지하쇼핑센터. 훈련을 알리는 지진 경보(사이렌)와 함께 '신속히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상점 밖으로 나오는 쇼핑객은 없었다. 지하상가에서 쇼핑하고 있던 시민 20여 명에게 민방위 통제관이 다가가 "당장 나가셔야 한다"고 했지만, 한 남성은 "지금 대체 뭘 하길래 사람을 강제로 나가라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국민안전처는 이날 오후 2시부터 20분 동안 처음으로 전국 단위 지진 대피 훈련을 했다. 지난달 12일 경북 경주시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을 계기로, 강진(强震)이 닥쳤을 때 대처 요령을 미리 몸에 익혀두자는 취지였다. 태풍 '차바' 피해 지역인 경주·울산·제주 등의 지역을 제외한 전국 곳곳의 정부기관과 자치단체, 공공기관, 초·중·고교 등이 훈련에 의무적으로 참여했다. 훈련 참가 희망 의사를 밝힌 상점이나 기업들도 이번 훈련을 받았다. KTX·지하철 등 대중교통과 항공기·선박은 훈련에서 제외됐다.이날 훈련은 오후 2시 1분 지진 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훈련 참여자들이 책상이나 탁자 밑으로 들어가 3분간 대피한 뒤 출입구 개방과 전기·가스 차단 등 예방 조치를 하고 2시 10분 대피 경보에 따라 인근 광장이나 공원 등 야외로 대피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날 훈련에서 안내 방송과 통제관의 지시에 따라 신속히 대피하는 시민들은 별로 없었다. 훈련 사이렌이 울린 이후에도 대피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고, 현장 통제관들도 구체적인 지진 대피 요령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오후 2시 1분 서울 강남구의 한 회사 내부에 '엥~'하는 사이렌 소리가 퍼졌다. 하지만 책상 밑으로 대피하는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몇 분 뒤 '5.9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으니 밖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20여 명의 직원은 자리에 남아 업무를 봤다.

훈련장 주변 관리도 엉망이었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 주변에 배치된 통제관들은 완장만 차고 있을 뿐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대피를 유도하지 않았다. 인근 관공서와 회사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광화문 광장 주변에서 벌어지던 집회의 마이크 소리와 인근 행사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묻혔다. 대피 방송을 듣고 건물을 빠져나온 회사원들은 넓은 공원이나 야외 광장, 운동장 등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매뉴얼과 달리, 고층 건물이 즐비한 광화문광장 인근 골목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진이 발생할 경우 대형 건물 옆은 낙하물에 맞아 다칠 우려 때문에 대피 장소로는 부적격이다. 회사원 이모(45)씨는 "구체적인 행동지침 교육 없이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고만 했다"며 "애들 장난하는 것 같아 시간이 아깝다"고 했다.

국민안전처는 이날 지진으로 도로가 마비되고 화재로 건물이 무너져 유해가스가 유출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훈련을 진행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의무 참가 대상이었던 공무원들도 훈련에 소홀한 모습이었다. 광주광역시 청사에 근무하던 상당수 공무원은 지진 사이렌이 울린 이후에도 사무실 책상에 앉아 전화를 하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청사 근무 인원 1400여 명 가운데 2시 10분 대피 사이렌이 울린 이후 밖으로 나온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지진 대피 훈련이 실시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난 5일 태풍 차바가 몰고 온 초대형 파도로 피해를 본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 일대에도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인근 공터 등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하는 시민은 거의 없었다. 한 통제관은 구체적인 대피 행동 요령을 정리해놓은 안내문 수십 장을 시민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손에 쥔 채 동료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인세진 우송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은 몸에 익을 정도로 돼 있지 않으면 실제 재난이 닥쳤을 때 효과를 보기 어렵다"며 "사전 교육이 가장 중요한데, 홍보 부족으로 훈련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국민안전처는 이날 훈련을 주관하고도 훈련에 참가한 기관이 몇 곳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안전처 관계자는 "훈련 계획 수립과 준비에 통상 2개월 정도가 걸리는데 이번 훈련은 (지난달 경주 지진 이후에 결정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