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없는 걸까. 아니면 판단력이 부족한 걸까. 말 한마디 실수하면 '여혐(여성 혐오)'이라 비난받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라고 포효하는 '만용'(蠻勇)이라니.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남아일언중천금' 계열의 의리와 호탕함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허술하고 못난 사내들이 허당을 잇따라 짚는다. 모두가 각자의 인생을 걸고 한바탕 도박을 벌이지만, 결국은 모두가 부처님 손바닥이었음을 뒤늦게 깨우치는 세계, 노회한 건달 최대의 적은 노화라는 주장이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임을 확인하는 세상,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다가 결국은 그 성적 대상에 의해 구원받는 가련한 영혼들의 세계. 그것이 가련한 '남자의 세상'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이후 4년 만에 펴낸 천명관의 이 장편에는 멀쩡한 허우대나 번지르르한 허풍 뒤에 숨은, 어리석고 추접스러운 뒷골목 사내들이 박스 단위로 등장한다. '구라'와 '찌질한'이라는 저잣거리 명사, 형용사가 훨씬 더 어울리는 인생들이다.
예를 들어보자. 흙구덩이에 파묻힌 뒤 그 흙을 파먹으며 사흘 만에 살아나왔다는 전설의 조폭이지만 현실에서는 애송이한테도 피떡 되도록 두들겨 맞는 인천 연안파 양 사장, '굵은 바늘로만 오백 바늘' 별명을 지닌 무적의 행동대장이지만, 실제로는 코가 예쁘다는 이유로 동성(同性)의 감방 동기에게 끌리는 형근, 멍청한 영화제작자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은 뒤 에로 영화 감독으로 변신해 '연기 지도' 재미에 빠져 사는 사채업자 박 감독, 여기에 당구도박사 '작대기', 사설 경마 사기꾼 원봉이, 아내까지 팔아먹을 기세의 도박 중독 대리기사 용관이….
/일러스트=김시훈
이 너절한 남자들을 유혹하는 서사의 두 핵심 엔진은 35억짜리 종마(種馬)와 20억짜리 밀수 다이아몬드다. 경마 조작 임무를 띠고 망치로 말 무릎 때리러 갔던 '비정규직 조직원'(바야흐로 건달도 청년실업 시대다!) 울트라가 '형님'에게 잘 보이려고 트럭에 아예 종마를 싣고 온 사건이 하나, 송도에서 열리는 주얼리 박람회에 출품된 콩고 다이아몬드를 바꿔치기하려는 사기와 협잡의 세계가 나머지 하나다. 이 두 세계가 이중나선으로 얽히면서 말 그대로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 펼쳐진다. 이 카니발에 소위 지식인들의 현학(衒學)은 발붙일 자리가 없다. 말 그대로 '날것의 세계'. 시나리오 작가라는 작자마저도 상궁과 빈(嬪)을 분류할 때 '왕(王)하고 ○을 치느냐 안 치느냐'로 구분하는 천격(賤格)의 세계. 이 천격의 세계를 민망해하고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하지만 위선이라고는 터럭 하나도 발견하기 힘든 이 생고기의 세계를 통해, 어쩌면 우리는 금기를 위반하며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주인공들의 쾌락을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고래'의 진경에서 확인하듯, 천명관 소설의 매력은 시공을 초월한 전지전능 이야기꾼의 입담이다. 양사장 형근이 원봉이 울트라 깡구 뜨근이 작대기 손회장 장다리 루돌프 용가리 등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질펀한 술자리에서였건, 예비군 훈련장에서였건, 남자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뒷골목 이야기들. 야담 괴담 기담이다가, 때로는 소문 허풍 인터넷 유머이고, 또 때로는 무협지 한 장면이거나 장르 영화 한 대목이었던 이야기, 이야기들. 세상에 떠도는 이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완성한 또 한 편의 '거대한 구라'인 것이다.
이 세상이 이야기로 가득한 세계라면, 우리는 결국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그 세계를 즐기는 법. 종마와 다이아몬드에 휘둘리는 건달들의 세계가 '고래'만큼의 밀도를 지녔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거대한 구라꾼'이 펼치는 2016년의 불꽃놀이 역시 놀라운 흡인력으로 침 삼키며 다음 장을 따라 읽게 만든다.
천명관이 이번에 제출한 '남자의 세상'에는 오직 한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액면'으로만 보면 장다리의 업소에서 '에이스'로 뛰다가 선불로 받은 3000만원을 슬쩍하고 사라진 지니. 흑룡강성에서 온 순진한 조선족 처녀로 위장한 지니는 어떻게 아버지뻘과 아들뻘인 양 사장과 울트라를 동시에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가 책 서문에 인용한 노래 한 토막이 그 힌트다.
"자 봐, 남자들은 우리가 타고 다닐 자동차를 만들고/ 무거운 짐을 운반할 기차를 만들지./ 남자들은 어둠을 밝혀줄 전깃불을 만들고/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처럼 배를 만들어./ 여기는 남자들의 세상. 남자들의 세상이지./ 하지만 여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소용 없어./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쓰라림에 헤맬 뿐."(제임스 브라운의 노래 '이것이 남자들의 세상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