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0.27 09:46

가을은 단풍과 억새의 계절이다.

산과 들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은 어느 산, 어느 계곡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억새밭을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5만 평이 넘는 억새밭이 산자락 전부를 덮고 일렁이는 풍경을 어디에서 볼 것인가.

그래서 나선 포천 명성산은 정선 민둥산과 장흥의 천관산, 창녕의 화왕산, 밀양의 사자평과 함께 전국 5대 억새 군락지로 손꼽히는데 수도권에 있는지라 다녀오기가 비교적 손쉬워 당일 등산 겸 집을 나섰다.

억새군락지까지는 산정호수에서 2시간쯤 올라가야 한다.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에둘러가는 우회로인지라 험하지는 않다. 억새밭 구경을 마치고 팔각정쯤에서 내려온다면 4시간 남짓한 산행이 되지만 조금 욕심을 내어 삼각봉을 지나 명성산 정상(923m)까지 다녀오면 6시간 남짓 소요된다. 특히 자인사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돌무더기 너덜지대로 가파르고 험난하다.

억새보다 단풍을 먼저 만나다

산정호수(山井湖水)가 있는 포천군 영북면은 지난 1997년부터 해마다 10월이면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국민관광지 산정호수와 억새밭이 함께 있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다. 게다가 억새밭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초입은 폭포가 흐르고 단풍이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하고 있어 단풍구경을 따로 갈 필요가 없이 일거양득이다.

산정호수 주차장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억새밭까지 이르는 등산로는 험하지 않고 무난한 길이다. 단거리로 올라가는 책바위 구간은 험하고 위험하여 산악등반 전문가가 아니면 가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반면에 폭포를 지나는 코스는 운동화 정도를 신고도 편하게 올라가는 길이다.

식당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작은 폭포를 하나 만나는데 비선폭포다. 여기까지만 해도 벌써 주변 단풍이 아름답고 가을철 갈수기를 맞아 수량이 많이 줄었지만, 폭포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조금만 더 걸어 오르면 우측 계곡의 아름다운 바위와 물줄기는 더욱 신비로워지고 등룡폭포에 이르면 전망대에서 바라보며 누구나 배경사진을 찍을 만큼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억새보다 단풍에 먼저 감탄하는 곳이다.

산정호수에서 명성산 억새밭을 오르면 먼저 만나는 단풍.
단풍에 감탄하다 보면 바로 비선폭포를 만난다. 작지만 예쁘다.
비선폭포를 지나 계속되는 단풍계곡.
마침내 자태를 드러낸 등룡폭포. 2단 폭포로 규모가 제법 크고 높아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장관일듯싶다.

억새밭 5만 평

억새밭을 보려고 올라왔다가 초입의 단풍에 취해서, 폭포의 경관에 반해서 자꾸만 발길이 늦어진다. 등룡폭포를 지나면 원만하게 우회하는 느낌이 끝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갑자기 오른쪽으로 철조망이 나타난다. 안내초소와 함께 '군 훈련장' 경고판이 보인다. 포사격에 놀라지 말라는데 실제로 '펑펑' 포 쏘는 소리가 들린다.

군부대 훈련장 표시가 나타나고 펜스 철조망을 따라 좌측으로 비스듬히 오르막이 시작된다.

여기까지 오르는데 1시간 남짓, 군부대 훈련장 철조망을 따라가다 보니 눈앞에 억새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꾸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서 마음이 바빠진다. 억새밭이 어디쯤 얼마큼 펼쳐질까?

잠시후 5만 평 억새밭이 눈앞에 나타난다. 저 높이 봉우리까지 큰 나무 하나 없이 온통 억새밭이다. 온통 은색의 키 큰 풀밭으로 보이는 억새밭은 가운데로 길게 통행로를 내고 좌·우측 능선, 봉우리까지 온통 억새뿐이다. 엎드려 숨으면 찾기 어려울 만큼 우거졌다.

군 훈련장 구간을 지나면 나타나는 억새밭,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예쁜 길이 보인다.
좌우 지형을 따라 계곡으로, 능선으로 온통 억새밭이다.

이렇게 감탄과 감상, 사진찍기에 열중하면서 억새밭을 오르면 한고비 능선 허리가 나타나는데 간단한 팔각정이 하나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커다란 붉은색 느림보 우체통과 함께 명성산 표지석이 보인다. 관광지마다 유행처럼 세워진 1년 후 배달해준다는 우체통이다.

문제는 그 옆에 세워진 명성산 표지석. 사실 이곳이 정상이 아닌데 많은 사람에게 정상으로 착각하게 한다. 왜 정상도 아닌 여기다 정상처럼 세웠을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고 명성산에 올랐다고 자랑한다는데 사실 진짜 정상은 여기서도 1시간 30분쯤 능선을 따라 더 가야 한다. 내친김에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억새군락지 능선에 세워진 느림보우체통과 명성산 표지석

억새군락지를 지나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길을 따라 1시간 이상 계속 가노라면 삼각봉이 나오고 거기서도 더 나가면 이제부터는 경기도 포천이 아니라 강원도 철원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마침내 명성산 정상(932m)이다. 능선을 따라가는데 큰 나무도 없어 숲 그늘이 없으니 갈 때는 등 뒤로 올 때는 정면으로 햇볕이 따갑다.

억새밭 - 삼각봉 - 정상까지 1시간 이상 계속 능선길을 따라간다.
1시간쯤 가니 삼각봉이다. 표지석이 거창하다 싶은데 여기까지가 포천군 지역. 명성산의 정상은 철원군이다 보니 명성산을 공유하고 행사나 탐방객은 더 많은 철원군 입장에서 못내 아쉬운 듯 그 아쉬움을 커다란 상징물로 대신한듯하다.
삼각봉을 지나면 '여기부터 강원도 철원입니다'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명성산 정상. 중간봉우리 삼각봉 표지석보다 훨씬 작고 간단하다.

명성산은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포천에 걸쳐 있다. 그러나 억새군락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포천군 지역인데 아쉽게도 정상 봉우리는 철원군에 속해 있으니 이름값은 철원에 있고 실속은 포천이 챙기는 셈이다. 그래서 포천에서는 억새밭 윗머리에 생뚱맞게 명성산 표지석을 세우고 제2봉쯤 되는 삼각봉에 표지석을 저렇듯 크고 화려하게 세운듯하다.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억새밭에 있는 표지석은 제거해야 바르다고 생각한다. 무심히 올라온 탐방객들이 그곳이 정상인 줄 오해하기에 십상이다.


궁예가 통곡한 명성산

쇠락한 통일신라를 이어받을 후삼국의 패권을 손에 쥐고 통일의 대업을 이룰 것 처럼 보이던 후고구려의 궁예, 견훤의 후백제와 함께 자웅을 겨루던 그는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에는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정하니 남쪽의 견훤보다 강성해 보일 때였다.

그러나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통치기반을 강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모색하는 개혁정책을 펼치다가 그를 지지하던 호족들로부터 반발을 사고, 심지어 강씨 부인도 극렬하게 반대하여 사형에 처하게 되는 등 지나친 가혹 통치로 마침내는 왕건을 위시하여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이 등을 돌리게 된다.

마침내 918년 왕건과 그를 지지하는 장군들에게 쫓겨나 강원도 들판을 전전하다가 군사들에게 칼에 맞아 살해당했다거나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다가 농민에게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는데 자신이 세우려던 태봉국의 비운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는 통곡을 하니 그 울음소리가 이 산중에서도 들려왔다 하여 울음 소리산, 즉 명성산(鳴聲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머잖은 한탄강은 그가 한탄하는 것을 빗대어 지은 이름이라고 하니 비록 패배한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이 땅의 산과 강, 계곡과 폭포 속에 그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억새축제

어쨌거나 서울에서 2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산정호수와 명성산은 사계절 국민관광지로 주목을 받는 곳이지만 특히 이맘때쯤이면 단풍과 억새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10월 하순인 지금은 조금 늦은 듯도 하지만 이달 말까지는 억새축제가 벌어지고 있으니 무난하게 볼 수 있을 듯하며 11월쯤이면 억새도 한풀 지난 계절이지만 축제를 마치고 나서 오히려 혼잡하지 않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돌아볼 수도 있어서 한 번쯤 찾아보기를 권해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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