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부터 60대까지 '최순실 촛불' 켜다

"태어나서 처음 집회에 나왔어요.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29일 오후 7시쯤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남자친구와 나란히 앉아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이모(여·22)씨는 "최순실씨 가족들이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유로 각종 특혜를 받았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집회 사회자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칠 때마다 큰 소리로 따라 했다. 이씨 주변에 앉아 있던 교복 차림의 중·고등학생과 50~60대 중장년층들도 같은 구호를 외쳤다.

이날 오후 6시부터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최순실 의혹과 관련, 진상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1만2000명 이상(경찰 추산·주최 측 추산은 2만여 명)이 참석한 이날 집회 참가자의 주류(主流)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온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깃발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는 조직적 참가자보다 일반 시민들이 훨씬 많았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현 정부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사태에 정말 화가 나서 나왔다"고 입을 모았다. '평생 1번(새누리당)만 찍었다'는 오모(59)씨가 "새누리당만 믿다가 이 지경이 됐다. 최순실 사건으로 지지자들 마음이 다 돌아섰다"고 외치자 그 옆에 있던 50대 남성이 "이번 사건엔 진보 보수가 없다"며 "사이비에 놀아난 대통령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했다.

중학생 장모(14)양은 "학교에서 애들이랑 '나라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하다가 오늘 처음으로 촛불집회에 나와 봤다"고 했다. 세 살짜리 아이를 안고 촛불을 든 김동주(35)씨는 "최순실의 딸이 '돈도 실력'이라고 말한 것이 정말 화가 나더라"며 "우리 애가 비리 없는 세상에서 재능을 펼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집회 참가 경험이 없는 대학생들은 온라인 익명 게시판을 통해 함께 나갈 참가자를 구하기도 했다. 지난 28일 서울대 학생이 만든 카카오톡 '집회 혼자가기 걱정돼 만든 방'이라는 대화방에는 400여 명의 학생이 몰렸다. 이들 대부분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29일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시위에 참가했다.

일반 시민 참가자들은 일부 좌파단체들이 이번 집회를 주도하는 데 거부감을 나타냈다. 회사원 정모(34)씨는 '백남기 투쟁본부' 정현찬 대표가 단상에 올라 "정권이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죽이고 칼 들고 갈기갈기 찢어 다시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오늘 대통령과 비선 실세 때문에 여기 나왔지만 백남기씨 사건은 저분들과 생각이 다르다"며 "경찰과 물리적 충돌 없이 집회가 평화적으로 잘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위 주최 측이 행진 도중 진로를 바꿔 청와대 쪽으로 향하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왜 주최 측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느냐"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AP통신과 일본 NHK방송, 영국 BBC방송 등 외신들은 이날 집회 소식과 현장 사진 등을 긴급 뉴스로 타전했다.

이날 오후 4시 전북 전주시에서는 시민단체 회원 250여 명이 '정권 퇴진' 등을 외치며 전주 한옥마을까지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벌였다. 전주 지역 시내버스들은 시위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3분간 경적을 울렸다. 부산, 울산, 광주광역시 등 대도시와 제주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도 300~1000여 명이 모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11월 1일부터 민중총궐기 집회가 예정된 12일까지 매일 저녁 촛불집회와 선전전, 시국선언 등을 가질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인 '최순실 시민행동'은 매일 저녁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빌딩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기로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전국 10여 개 도시에서 시민단체들이 최순실 사태를 비판하는 집회·시위를 계속 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