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로 주문하는 당신, 지금 '무보수 노동' 중입니다
입력 : 2016.10.28 23:41
티켓 자동발매기·셀프 주유… 직원의 업무, 고객에게 떠넘겨져
일자리 줄어드는 원인 중 하나
오히려 개인이 처리하는 일 늘어 현대인의 시간 부족 현상 심화
그림자 노동의 역습 |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336쪽 | 1만6000원
2007년 중국 출장길에 들렀던 상하이의 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겪은 일이다. 햄버거를 먹고 남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종업원이 황급히 달려와 뺏다시피 가져갔다. 둘러보니 홀에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분주히 손님들이 일어난 자리를 치우고 있었다. 함께 식사했던 중국인은 농담처럼 "저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지 말라"고 했다.
격월간지 '하버드 매거진'의 20년차 편집자인 크레이그 램버트의 책도 같은 발상(發想)에서 나왔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창한 이른바 '그림자 노동' 개념을 빌려와 오늘날 현대인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정보 혁명과 자동화가 진전되면서 '그림자 노동'이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형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샐러드 바에서 직접 음식을 담고, 공항의 터치스크린 키오스크에서 셀프 탑승 수속을 밟고, 극장에선 티켓 자동 발매기 앞에 줄을 선다. 인터넷 예매와 쇼핑·뱅킹처럼 그전에는 매장이나 창구 직원들이 처리했던 일들이 소비자들에게 떠넘겨졌다. 사람들은 극장이나 항공기의 좌석 배치표를 직접 고르는 '자율성'을 얻게 됐지만, 자기 시간을 '무료로' 바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책은 셀프 주유에서 공항과 호텔의 셀프 체크인까지 사람들이 '셀프 서비스'라는 이름의 자잘하고 사소한 '잡일'에 시간을 점령당하는 순간들을 포착해 보여준다. 저자는 "돈도 받지 않고 일해주는 고객들에게 일을 넘김으로써 막대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자본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자리 부족은 그림자 노동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무실과 공장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이나 외주 직원, 계약직으로 대체되고 있다. 저자는 "청년들이 사회에 나와 사람들과 대면(對面) 접촉하면서 처음으로 맡게 되는 초보적 일자리조차 줄면서 이들의 사회 적응 기회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팁을 아끼는 대신 후대의 삶의 질(質)을 희생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서 아우성이다.
2007년 중국 출장길에 들렀던 상하이의 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겪은 일이다. 햄버거를 먹고 남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종업원이 황급히 달려와 뺏다시피 가져갔다. 둘러보니 홀에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분주히 손님들이 일어난 자리를 치우고 있었다. 함께 식사했던 중국인은 농담처럼 "저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지 말라"고 했다.
격월간지 '하버드 매거진'의 20년차 편집자인 크레이그 램버트의 책도 같은 발상(發想)에서 나왔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창한 이른바 '그림자 노동' 개념을 빌려와 오늘날 현대인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정보 혁명과 자동화가 진전되면서 '그림자 노동'이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형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샐러드 바에서 직접 음식을 담고, 공항의 터치스크린 키오스크에서 셀프 탑승 수속을 밟고, 극장에선 티켓 자동 발매기 앞에 줄을 선다. 인터넷 예매와 쇼핑·뱅킹처럼 그전에는 매장이나 창구 직원들이 처리했던 일들이 소비자들에게 떠넘겨졌다. 사람들은 극장이나 항공기의 좌석 배치표를 직접 고르는 '자율성'을 얻게 됐지만, 자기 시간을 '무료로' 바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책은 셀프 주유에서 공항과 호텔의 셀프 체크인까지 사람들이 '셀프 서비스'라는 이름의 자잘하고 사소한 '잡일'에 시간을 점령당하는 순간들을 포착해 보여준다. 저자는 "돈도 받지 않고 일해주는 고객들에게 일을 넘김으로써 막대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자본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자리 부족은 그림자 노동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무실과 공장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이나 외주 직원, 계약직으로 대체되고 있다. 저자는 "청년들이 사회에 나와 사람들과 대면(對面) 접촉하면서 처음으로 맡게 되는 초보적 일자리조차 줄면서 이들의 사회 적응 기회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팁을 아끼는 대신 후대의 삶의 질(質)을 희생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서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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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은 생산 단계까지 침투했다. 스웨덴의 가구 업체 이케아는 전 세계 43개국의 매장에서 'DIY(Do It Yourself)'를 앞세운 판매 전략을 통해 가구 공장의 노동자들이 월급을 받고 하던 일을 손님들이 직접 하게 만들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과거 비서나 사무 보조원이 하던 일을 기꺼이 스스로 떠맡았다. 그렇게 일자리는 줄었지만 일은 오히려 늘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거의 모든 사무직 종사자들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더구나 이렇게 떠맡은 잡무가 임금을 올려주는 법도 없다. 서구의 거의 모든 기업에서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쇼핑이나 은행 업무를 보면서 디지털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개인 정보를 지키기 위해서도 노동을 해야 한다. 초창기 네 자리면 되었던 비밀번호는 이제 8자리를 넘어 영문과 숫자에 기호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대가 없는 그림자 노동이다. 21세기 인류는 컴퓨터에 매인 '농노'에 비유된다. 서버에 저장된 개인 정보는 '인질'인 셈이다.
그림자 노동은 결국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일을 더 많이 발생시켜 현대인을 분주하게 만들고, 지금도 시간이 부족해 쩔쩔매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시간을 빼앗아간다. 역설은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요즘 일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소비 행위를 하려고 해도 여가 시간이 필요한데, 요즘은 부유층조차 시간 부족을 호소한다"고 말한다.
책은 우리가 쉴 새 없이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이 누군가의 월급으로 지급되어 식료품을 사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아파트 관리비를 내는 데 쓰였어야 할 돈이 이 거대한 시스템 어딘가로 새고 있다는 암시를 주지만, 대안(代案)까지 제시하지는 못한다. 책은 시간의 중요성을 역설하다가 뚝 끝난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보다 나은 경제 체제를 인류는 아직 만들지 못했다. 원제('Shadow Work')에 '역습(逆襲)' 한 단어를 더 붙인 한국어 제목은 적절해 보인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과거 비서나 사무 보조원이 하던 일을 기꺼이 스스로 떠맡았다. 그렇게 일자리는 줄었지만 일은 오히려 늘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거의 모든 사무직 종사자들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더구나 이렇게 떠맡은 잡무가 임금을 올려주는 법도 없다. 서구의 거의 모든 기업에서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쇼핑이나 은행 업무를 보면서 디지털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개인 정보를 지키기 위해서도 노동을 해야 한다. 초창기 네 자리면 되었던 비밀번호는 이제 8자리를 넘어 영문과 숫자에 기호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대가 없는 그림자 노동이다. 21세기 인류는 컴퓨터에 매인 '농노'에 비유된다. 서버에 저장된 개인 정보는 '인질'인 셈이다.
그림자 노동은 결국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일을 더 많이 발생시켜 현대인을 분주하게 만들고, 지금도 시간이 부족해 쩔쩔매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시간을 빼앗아간다. 역설은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요즘 일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소비 행위를 하려고 해도 여가 시간이 필요한데, 요즘은 부유층조차 시간 부족을 호소한다"고 말한다.
책은 우리가 쉴 새 없이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이 누군가의 월급으로 지급되어 식료품을 사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아파트 관리비를 내는 데 쓰였어야 할 돈이 이 거대한 시스템 어딘가로 새고 있다는 암시를 주지만, 대안(代案)까지 제시하지는 못한다. 책은 시간의 중요성을 역설하다가 뚝 끝난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보다 나은 경제 체제를 인류는 아직 만들지 못했다. 원제('Shadow Work')에 '역습(逆襲)' 한 단어를 더 붙인 한국어 제목은 적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