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마저 식어간다

18호 태풍 '차바'가 영남 지역을 휩쓸고 간 지난달 6일. 피해를 입은 경남 양산시 웅상면 주민들이 성금 모금을 시작했다. 한 주민이 "우리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힘을 준 소방관들에게 작게나마 보답을 하자"고 제안해 공감을 얻은 것이다. 주민들은 소방관들이 복구 작업에 쓰는 장갑 등 장비와 물품을 지원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모금을 시작한 지 5~6일 만에 성금 200여만원이 모였다.

그러나 이 돈은 소방관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양산소방서 산하 물금·웅상119안전센터에서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성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돈을 낸 주민 가운데 일부가 자영업자라는 게 문제였다. 자영업자는 매년 소방서의 안전 점검을 받기 때문에 직무 관련성이 있어서 성금이 뇌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금에 참여한 주민 진모(36)씨는 "좋은 뜻으로 시작한 기부까지 가로막는다면 법이 너무 빡빡한 것 아니냐"고 했다.

강원 인제군에 있는 원통초등학교 신덕분교도 청탁금지법 때문에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바자회를 취소했다. 전교생이 3명인 이 학교는 매년 학생과 학부모, 교사는 물론 마을 주민까지 참여하는 바자회를 열고 수익금을 자선단체와 장애인 재활 시설에 기부했다. 조춘묵 신덕분교장은 "국민권익위원회에 문의한 결과 행사 중 학부모가 교사에게 식사 제공을 하면 법 위반이고, 기부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것도 교육지원청과 협의하라는 애매한 답을 전달받았다"며 "마을 잔치 같은 행사인데 식사도 함께 못 하게 하고 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하니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청탁금지법은 시행 전부터 '너무 엄격한 법 규정 때문에 기부나 복지 사업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받았다. 시행 한 달 동안 이런 우려는 사회 곳곳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연탄 기부가 대표적이다. 사회복지 단체인 '밥상공동체연탄은행'은 연탄에 의지해 추운 겨울을 나는 전국 16만8000여 영세 가정을 위해 해마다 연탄 400만~600만장을 지원해왔다. 그런데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기부 의사를 밝힌 기업·공공기관 등이 확연히 줄었다고 한다. 연탄은행 허기복 대표는 "서울에서만 대기업과 공공기관 등 15곳이 작년과 달리 기부를 망설이고 있다"면서 "기업 측에서 '선생님에게 학생이 과자 드리는 것도 걸린다는데, 기부했다가 괜히 꼬투리 잡히는 거 아니냐'는 문의 전화가 많았다"고 말했다. 서울연탄은행의 경우 지금까지 연탄 9만1000장을 마련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나 줄어든 것이다. 청탁금지법 시행 후 한 달간 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접수된 기부액은 3억9000여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6% 감소했다.

청탁금지법 적용을 받는 유치원에서는 기부하려는 학부모들과 이를 말리는 교사들 간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울 송파구의 한 유치원은 미세 먼지 제거를 위해 공기청정기를 기부하겠다는 학부모들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이 유치원 송모(여·35) 교사는 "권익위에 문의했더니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할 때까지 대여 형식으로 주는 건 문제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며 "권익위의 알쏭달쏭한 답변을 믿느니 그냥 학부모들을 설득해 기부를 못 하게 했다"고 말했다.

기부금 관련 문의가 쏟아지자 권익위는 "불우 이웃 돕기처럼 공익 목적이고 기부 행위와 집행이 투명한 절차에 따른다면 사회 상규상 허용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회복지 단체들은 "사회 상규상이라는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고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건별로 권익위의 유권해석을 의뢰하고 있지만 제대로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권익위에 따르면 지난 25일까지 유권해석 문의 총 9351건이 접수됐는데, 이 가운데 83%인 7772건은 답변 처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