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시각적 아름다움 넘어 '촉각'에 집중했죠"

"딸과 함께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전시장에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지금도 '이따리아나'를 입으면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말씀해 주시니,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이죠."

국내 대표적인 1세대 디자이너 한혜자(71)의 평생 업적을 돌아보는 전시 'Tactus(촉각)'가 오는 20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서울패션위크 명예디자이너로 그를 추대하고 초청 전시를 기획했다. 한국 패션계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디자이너로 선정돼 전시를 여는 것은 지난해 진태옥(82)에 이어 두 번째다.

한혜자의 브랜드 '이따리아나'는 1972년 이화여대 앞에서 출발했다. 당시 유행이던 화려하고 여성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간결하고 모던한 의상, 새롭고 희귀한 소재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쪼글쪼글하고 얇은 '크링클'은 지금도 '이따리아나'의 상징 같은 소재다. 1984년 파리컬렉션에 진출했고, 지금도 서울 주요 백화점 등 전국 15개 매장을 운영하며 44년간 패션업계에서 자리를 지켜왔다. 통칭 1세대로 분류되는 디자이너 가운데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감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온 이는 흔하지 않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80여점은 옷이라기보다는 설치미술에 가깝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 생명의 근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돌·흙·나무·이끼 등 자연의 질감을 살린 작품이 많다. "패션이 시각적 아름다움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소리가 나는 옷, 향기가 나는 색깔을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1990년대 초 선보였던 와인잔 매단 드레스처럼 공감각적 자극을 주는 작품들도 포함됐다.

패션 디자이너 한 사람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는 전시가 열리는 것은 국내에서 드문 일이다. 국내 최고 스타일리스트로 손꼽히는 서영희(55)가 예술감독. 그는 진태옥 50주년 기념전, 한국 패션 100년 전 등 역사성 담긴 전시에 주로 참여해왔다.

서 감독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역사를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제품 가치를 높이고, 거기서 스토리를 끌어내 마케팅에 무궁무진하게 이용한다"며 "우리도 패션을 단순한 트렌드로 소비하는 현실을 넘어, 문화·언어·역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