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곰돌이 하나, 콜라 하나… 잘근잘근 씹으니 화가 풀리네

"쥐 죽은 듯한 사무실에선 껌을 씹을 수 없어요. 부스럭 소리 내며 사탕 껍질 까는 건 더욱 못하죠. 하지만 젤리는 달라요."(정은주·29세)

"곰돌이 같은 동물 모양 젤리는 그날 기분에 따라 머리나 다리부터 먹어요. 포도 같은 과일 모양은 한알·한쪽씩 뜯어먹죠."(김혜리·26세)

"일이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젤리를 먹어요. 상사 얼굴 떠올리며 잘근잘근 씹다 보면 화가 풀릴 때 많습니다."(유정욱·33세)

말랑말랑한 젤리가 껌·사탕이 지배하던 '추잉푸드(chewing food)'의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부드럽고 목에 걸릴 위험이 덜해 어린이 간식으로 인기였던 젤리가 요즘은 20~30대 성인들의 '주전부리'로 사랑받고 있다.

사탕과 껌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젤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독일산 젤리 '하리보'가 등장하면서다. 알록달록한 색깔과 여러 가지 맛을 지닌 하리보 젤리가 수입되면서 '젤리는 어린아이들이 먹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AC 닐슨에 따르면 국내 젤리 시장은 올 8월, 94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650억원) 대비 45% 증가한 수치다. 최근 3년간 연평균 50%씩 성장하고 있는 젤리 시장은 올해 15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 반면, 2450억원(2014년)을 기록했던 껌 시장은 8월 현재 160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며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오리온제과에서 작년 7월 출시한 '젤리밥'은 1년 만에 누적 매출 90억원을 돌파했다. 오리온 식품연구소 박민석 부장은 "젊은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독특한 식감의 젤리를 경험한 것이 국내 젤리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기존의 부드럽고 달기만 한 젤리에서 쫄깃하고 담백한 식감의 젤리로 종류와 색상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품업체·편의점들이 올해 새롭게 선보인 제품만 해도 10종류가 넘는다. 요구르트 맛(세븐일레븐), 사이다 맛(CU), 심지어 꼬깔콘 맛(GS25), 수박바 맛도 있다. 롯데제과는 올해 껌 대신 7종의 새로운 젤리를 출시했고, 홈플러스는 커피 프랜차이즈 '엔젤리너스'와 협업해 커피 맛 젤리를 선보였다. 편의점은 아예 입구 진열대나 계산대 옆에 젤리를 배치한다. '○○젤리 있습니다'와 같은 글로 구매욕을 부추기기도 한다. 젊은 소비자들은 맛 후기, 먹는 방법, 인증샷이 담긴 SNS로 신제품 정보를 접한다. 신상 젤리의 맛·식감 등을 품평해놓은 이윤정씨의 블로그 글은 10만명이 읽었다.

젤리 열풍은 어린 시절 향수(鄕愁)와도 연관된다. 이지현(29)씨는 "콜라·사이다 맛 젤리를 먹다 보면 어릴 적 동전 들고 문방구에 가 부모님 몰래 불량식품 사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스트레스와 책임감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어릴 때 먹어본 음식, 혹은 아이 같은 행동으로 안락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 키덜트(아이 같은 어른)"라며 "달콤새콤한 젤리를 씹을 때만큼은 어른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그 시절 푸근함을 느끼는 일종의 퇴행행위이자 스트레스 방어기제"라고 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2030세대는 자신의 SNS 게시물에 달리는 주변의 관심으로부터 만족감을 얻는데, 현재 그 대상이 젤리"라며 "젤리를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로 만들며 '내가 새로운 열풍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쾌감, 동시에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