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국제사회에 동양 사상 알릴 것"

"유학하고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이 '이론도 좋지만 미국·중국·일본·북한 중에 하나 골라야 먹고산다'고 했어요. 하지만 좋은 일을 소신 있게 밀고 나가다 보니 국제적인 출판사 편집장까지 맡게 되더라고요."

인문·사회학계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출판사인 '루틀리지'의 아시아 시리즈 편집장은 한국인이다. 은용수(39)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아시아 곳곳에서 정치외교학자들이 보내온 원고를 심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동양에도 훌륭한 사상과 이론이 있다는 걸 알려야겠다는 책임 의식으로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잘 알지 못하는 교수가 제안을 하니 무슨 힘이 있겠냐"면서 "학회와 학술지를 통해 뜻이 맞는 학자를 찾아 동참을 부탁했고, 1년 넘게 설득한 끝에 루틀리지가 아시아 시리즈를 내게 맡겼다"고 했다.

편집장 임기는 10년이다. 시리즈의 기획 의도에 맞는 연구 질문을 제시하고 학자들이 제안서를 보내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책을 출간한다. 1년에 한 권씩 총 열 권을 발간할 계획이다.

은 교수는 "합리성을 강조하는 서양 정치 이론으론 동양의 역사와 관계 중심적 외교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쉬운 사례로 냉전(Cold War)을 들었다. "사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수백만 명이 희생당한 열전(熱戰)이었어요.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 한국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도 우리는 '냉전'이라고만 배우죠."

특히 한국은 '일제강점기·전쟁·독재 등 역사적으로 아픈 기억들이 아직까지 현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라고 평했다. "넬슨 만델라의 공동체 중심 사상부터 함석헌 선생의 '씨알 사상'까지 서양 바깥엔 관계 중심적인 사상이 많거든요. 이러한 틀로 한국 현실을 바라보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겠죠."

최근엔 3년 동안 6단계의 심사를 통과해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출판사 폴그레이브 맥밀런과 스프링어에서 저서 '국제관계학에서의 다원주의와 이론적 관여'를 출간했다. 겉으론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서양 중심의 이론으로 쏠려 있다는 내용이다. 수십 개 이론이 있지만 미국 주류 학교에선 4개 이론이 강의 내용 90%를 점령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언어의 제약은 없었는지 묻자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 비법을 알려줘야겠다"며 웃었다. 은 교수는 석사까지 국내에서 마치고 박사 학위만 영국 워릭대학에서 받았다. 그가 공개한 비법은 좋은 논문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었다. "100번, 200번 보고 외우고 따라 쓰면서 공부했어요. 실제로 대화할 때도 문어체가 나오긴 하지만 큰 불편은 없어요."

현재 국제정치이론, 외교정책론 등 강의만 4개를 맡고 있고 정치외교학과장으로서 학생과 면담도 활발히 한다. '동양 이론의 전도사'가 된 이유는 "맨날 똑같은 이론, 똑같은 사상만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의실에서도 서양 이론과 비(非)서양 이론을 동등한 비율로 가르친다. "요즘 애들이 정치 이론, 그것도 비주류 이론에 관심을 기울일까 싶지만 다른 대학에서 청강을 올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기회가 없을 뿐이지 학생들은 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기존의 통념을 깨고 선택지를 넓혀주는 교수이자 학자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