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도 '혼놀'도, 여기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30대 직장인 강기현(가명)씨는 최근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에 "'불금'(불타는 금요일)인데 퇴근도 안 시켜주네"라거나 "으이그~ 스마트폰 대신 땅을 보고 다니면 돈이라도 줍지…" 같은 글과 그림을 올리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아이디는 '내 꿈은 돈 많은 백수'. 이런 이름으로 SNS에서 활동해도 들킬 염려는 없다. 신상(身上)이 노출되지 않는 익명(匿名) 기반 SNS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남들 시선 신경 쓰며 글이나 사진 올리는 것도 지쳤다"며 "익명 SNS에서 오히려 '진짜 나'를 표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 혼자 노는 SNS 등장

SNS가 일상이 됐지만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게 거추장스러운 이들도 있다. 이들은 익명의 계정을 만들거나, 혼자 놀 수 있는 SNS를 찾아 떠난다. 모바일 메신저 업체 카카오가 최근 선보인 '썹(ssup)'은 바로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익명으로 가입하고 익명으로 글을 게재한다.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애인 하나 없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넋두리형'이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분노폭발형' 콘텐츠들도 꽤 올라온다. 일명 '짤방'(짤림 방지 사진)으로 불리는, 혼자 보기 위해 '저장'해두는 재미있는 콘텐츠들도 많다.

신상이 드러날 위험(?)이 없다 보니 창의적 콘텐츠가 오히려 많은 편. 카카오의 서리안 매니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신경 쓰지 않으면서 모바일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는 수요가 의외로 많았다"며 "대담한 스토리나 사진·그림 등 창의성이 폭발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19금(禁)'이나 명예훼손성 콘텐츠에 대한 모니터링과 신고 기능이 있어 선정적 콘텐츠가 올라오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앱 다운로드 1만 건으로 아직 많지 않지만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특정 기업 직원들이 익명으로 가입해 게시판에서 의견을 나누는 '블라인드' 앱은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만 50만 건 이상 다운된 것으로 나타났다.

◇익명이 더 편한 사람들

서울 반포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김지은(17·가명)양은 최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고 대신전해드립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누가 누구랑 사귀는지,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시시콜콜 정보를 나눈다. 하지만 자기가 몇 학년 몇 반의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같은 학교 학생인 운영자가 글을 받아 '대신' 올려주기 때문이다. 김 양은 "우리만의 비밀대화 창구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엔 "조금 전 오후 3시 과학실에서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글을 올린 직후 '신발장 아래에서 봤다'는 답글이 올라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학교숙제·성적·과목별 선생님 성격 등도 올라온다. 같은 학교 재학생임을 확인하기 위해 '3학년 수학 샘 별명은?' 같은 인증용 문답을 요구하기 때문에 '외부인'은 끼어들기 힘들다.

최근엔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세종시나 서울 노원구 등 지자체마다 '대신전해드립니다' 익명 페이스북도 나타나고 있다. 지자체에선 지역별 공연·행사 정보나 물물교환 정보 등을 많이 나누는 편이다. 페이스북코리아 관계자는 "하나의 페이스북 계정을 여러 명이 익명으로 함께 쓰는 형태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다"고 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씨는 "SNS가 '자기 과시'의 잔치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를 스트레스로 느끼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며 "우리 사회의 네트워크가 너무 촘촘해지면서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함께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