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와 가방을 풀면서 또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한다.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지난 여름비에 젖어있던 규슈 올레가 생각났다.
올레 코스가 표시된 산 언덕 위 히라도 성의 모습이 보인다. 포장된 숲길 보다 산의 흙길을 좋아하는 내게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게 한다. 그러나 시작점의 평온했던 마음과는 달리 포장된 숲길을 비켜가자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자신의 지역을 침범한 침입자에 놀랐는지 눈앞에 하얀 실뱀이 꼬리를 흔들면서 숲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두 마리 하얀 실뱀의 꼬리를 보고 난 후 나는 빨리 그 숲을 벗어나고 싶어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어디선가 어미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자 그러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앞서 가던 학생은 '독 없는 뱀이라 괜찮다'고 웃으며 돌아본다. 실뱀이 사라진 어두운 숲길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가득한 숲길이 이어지는데 아기 손바닥만 한 거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편안한 도심 관광이나 할 것을…'하는 후회가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끝 지점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숲길은 비가 내린 여름의 흔적으로 작은 물줄기가 땅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어 조심스럽게 미끄러운 길을 피해서 걸어야 한다.
실뱀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였던 숲길이 끝나자 안개 가득한 푸른 초원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뱀은 다시 만나지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으로 바라보는 30ha의 광대한 초원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제주 기생화산의 모습을 닮은 가와치토우게의 정상에서 만나는 해무(海霧)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난여름의 경험으로 이번에는 발가락 보호기능이 강화된 신발을 착용하였고 발바닥에도 미리 밴드를 붙여 올레길의 끝 지점에서 나는 매우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