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조동진 "텅 빈 시간들이 내겐 최고의 순간"

8일 서울 대치동 마리아 칼라스홀. '한국 포크 음악의 대부' 가수 조동진(69)의 음반이 20년 만에 발매된다는 소식에 후배 가수 전인권과 유열, 권진원 등이 축하하기 위해 무대 뒤로 달려왔다. 와인 한 병을 들고 온 유열은 "드디어, 드디어…"라면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권진원은 초콜릿 케이크를 사 들고 와서 탁자에 꺼내놓았다. 빈손으로 온 전인권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뷔 30년 이상의 중견 가수들도 조동진 앞에서는 '새카만 음악 후배'가 되어서 "형님"과 "오빠"라고 그를 불렀다. 가수 한영애·한동준·장필순, 조동진의 동생이자 1980년대 전설적 포크 듀오 '어떤날'의 조동익까지 한국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이날 자리는 20년 만에 발매된 조동진의 6집 음반 '나무가 되어'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됐다. 축하 방법이 독특했다. 별다른 소감 발표나 질의응답 없이 조동진의 새 음반에 실린 10곡의 신곡을 컴컴한 공연장에 다 함께 앉아서 듣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날 모임에 '조동진 음악 감상회'라는 명칭이 붙었다. 전인권과 권진원도 이날만큼은 청중이 되어 맨 앞좌석에 조용히 앉았다. 50여 석이 모두 차는 바람에 자리에 앉지 못한 관객은 복도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빨리,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을 줄 몰랐어. 기타를 집어넣는 데 10년, 다시 꺼내는 데 10년이 걸린 셈이네." 조동진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담긴 짧은 영상에 이어 소속사 푸른곰팡이 측의 간단한 해설과 함께 10곡이 차례로 흘렀다. 조동진은 1979년 '행복한 사람'이 담긴 1집 음반을 발표하며 서정성 짙은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비꽃' '나뭇잎 사이로' 같은 명곡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조동익·이병우·장필순 등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과 함께 '조동진 사단'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하나 있었다. 1979년 데뷔 음반 이후 30여 년간 발표한 음반이 6장에 그칠 만큼 지독한 과작(寡作)이라는 점이다. 조동진은 이번 음반을 내놓으면서 이런 소감을 밝혔다. "허송세월하면서 보냈던 그 텅 빈 시간들이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장조풍의 단아한 선율과 사색에 잠길 틈을 주는 여유 있는 템포는 여전했다. 도입부나 후렴구에서 오케스트라와 전자 음향을 동원해서 풍성한 음색이나 실험적 사운드를 가미한 점은 낯설고도 신선했다. 조동진의 포크 음악이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실험적 로큰롤을 투과한 것만 같았다. 뮤직비디오나 실연(實演) 없이 음반을 틀었는데도, 공연장에 온 것처럼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보내는 풍경은 이채로웠다.

이날 객석에는 동료 가수뿐 아니라 문인도 적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씨는 "아날로그가 힘을 잃고 파편화된 조립품으로 전락하는 시대에도 조동진은 값싼 나르시시즘이나 도취에 빠지지 않고 남다른 시적 가치를 전달한다"고 말했다.

이날 마지막으로 들려준 곡은 '천사'. 이번 음반을 준비하던 중인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는 '사부곡(思婦曲)'이다. "그댄 어쩌면 천사였을지도. 기다란 방을 지나. 빈 가슴으로 다가와. (중략) 눈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세상. 그 속에 다시 설 때까지 날 지켜준 천사."('천사') 1시간 50분에 이르는 감상회 내내 조동진은 끝내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눈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