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민심에 스스로 놀란 미국 "2주 전엔 상상도 못했던 밤"

8일(현지 시각) 밤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힐튼 미드타운 호텔 연회장.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지지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당선 축하 이벤트가 열렸다. 연회장을 채운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적힌 빨간 모자를 쓰거나 빨간 피켓을 들고 환호성을 올렸다. 트럼프가 승기를 잡은 밤 10시부터는 서로 껴안으며 "우리가 이겼다!"고 소리쳤다. "힐러리 클린턴을 감옥으로!"라는 구호도 터져 나왔다.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는 개표 초기 가족들이 함께 호텔 상황실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결과를 지켜보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오후 8시 55분쯤 "이번 선거 팀은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오늘 밤 어떤 일이 생기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지지자를 포옹하고 있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선거 패배를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같은 시각 클린턴의 선거 승리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던 뉴욕 맨해튼의 재비츠 컨벤션 센터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요 경합 지역에서 클린턴이 줄줄이 패했다는 소식에 떠들썩했던 파티 분위기는 일순간 잦아들었고, 무대와 조명도 곧바로 철거됐다. 당초 이날 새벽부터 줄 서서 입장한 클린턴 지지자 수천 명은 서로 부둥켜 안고 울거나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직후, 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는 클린턴 지지자 1500여 명이 반(反)트럼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시위대는 '그는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Not My President)'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했고, 일부 군중은 차량 유리를 깨뜨리거나 거리 쓰레기통이나 타이어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대학생 500여 명도 트럼프 당선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행진했다.

워싱턴 백악관 앞뜰에선 트럼프와 클린턴 지지자 400여 명이 휴대전화로 개표 방송을 지켜보다가 거친 설전을 벌였다. 클린턴 지지자들이 "빌어먹을 트럼프"라고 욕설을 내뱉자, 트럼프 지지자들은 "(멕시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한) 벽을 세우자!"고 맞불 구호를 외쳤다. 클린턴 지지자 캐런(여·23)은 주변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USA"를 외치며 환호성을 지르자 "앞으로 저런 극단적 세력들이 더 등장할 게 뻔하다. 끔찍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트럼프에게 비판적이었던 미 언론들은 반성하는 논평을 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9일 새벽 "언론들이 미국인의 거대한 외침을 놓쳤다"고 했다. 이 신문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자동차 회사 실업자와 광부들을 인터뷰하고서도 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전날까지 클린턴의 당선을 점쳤던 방송 진행자들은 개표 방송 도중 당황스러워했다. 개표 방송 초반만 해도 방송 진행자들은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한 듯 농담을 주고받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후 10시쯤부터 선거 판세가 요동치자 표정이 달라졌다. CBS의 노라 오도넬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밤"이라고 했고, CNN 방송의 존 킹은 "2주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대화를 지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 소식에 실망한 클린턴 지지자들이 캐나다와 뉴질랜드 이민 사이트에 몰려드는 바람에 이들 이민 사이트가 한때 마비되기도 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캐나다 이민국(CIC)이 운영하는 공식 사이트는 대기 시간이 늘어나거나 접속 불가 상태가 되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이민·학생 비자 업무를 담당하는 웹사이트인 '뉴질랜드 나우' 접속도 폭증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뉴질랜드 나우' 방문자가 지난해보다 80% 가까이 늘었으며, '이민 가다(emigrate)'라는 단어 검색도 증가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