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눈과 발 돼… "여행, 어렵지 않네요"

차 안에서 매니저가 울고 있었다. "형, 누가 형한테 눈을 주겠대요."

2010년 초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나오던 시각장애인 가수 이동우(46)씨는 "처음엔 말을 잇기조차 힘들었다. 살면서 내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거나 준 적 있었나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개그맨과 가수로 활발히 활동했던 이씨는 진행성 난치병 망막색소변성증으로 2004년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임재신(44)씨. 근육병의 일종인 근이양증으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자신도 딸을 둔 아버지로서, TV 다큐에서 어린 딸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이씨를 보고 "내 남은 5%를 저 사람에게 주면 저 사람의 삶은 100%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10일 개봉하는 다큐 '시소'(감독 고희영)는 그렇게 서로를 알게 된 두 사람이 친구가 돼 떠난 제주도 여행을 담담히 담았다. 보지 못하고 만질 수 없어도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갈대가 서걱이는 소리로 충만한 제주의 숲과 해변이 스크린에 가득하다. '앞만 못 보는' 이동우는 '앞만 볼 수 있는' 임재신이 탄 휠체어를 밀며 함께 간다.

최근 시사회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재신이와 처음 본 건 그해 11월 방송국으로 찾아왔을 때였어요." 동우씨 말에 재신씨가 덧붙인다. "망막 이식도 할 수 없는 난치병이라는 얘길 듣고 죄송한 마음에 그냥 전화를 끊었거든요. 방송에서 계속 고마움을 표시했단 얘기를 들었어요. 만나고 싶었죠. 오히려 제가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았어요." 이후 동우씨가 재신씨의 천안 집으로 찾아가고 재신씨가 동우씨 서울 공연장으로 오가며 우정이 계속됐다.

여행 자체가 쉽지 않은 두 사람에게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특별했다. 동우씨는 "여행 중에 '시소'라는 제목을 떠올렸다"고 했다. "딸아이와 놀이터에서 재밌게 놀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요. 시소는 마주 앉은 친구를 재밌게 해주려는 마음이 없으면 자기도 재미가 없는 거잖아요. 우리 여행도 그러면 좋겠다, 세상이 그런 놀이터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요."

각본도 감독의 지시도 없는 다큐지만 두 사람 대화엔 울림이 있다. 자기 인생에 정직한 사람, 자기 고통에 겸허한 사람에게서만 울려 나올 수 있는 감동이다. 동우씨는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불행이 찾아올 때도 있다. 힘들지만 받아들이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재신씨는 "걷는 것에 대한 꿈은 없지만 대신 없는 길을 만들어 보고 싶다"며 평생 꿈이었던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한다. 늘 그렇게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시냐고 묻자 재신씨가 웃었다. "열흘 여행인데 영화는 76분이니 찍은 걸 얼마나 많이 들어냈겠어요? 둘 다 잘 못 움직이니 수다가 취미예요. 나중에 감독님이 그러시데요. '얌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둘이 너무 말이 많아 놀랐다'고."

동우씨는 "기적은 초자연적인 게 아니고 숨 쉬는 한 스스로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말 기적처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을까. 동우씨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야한 성인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재신씨는 "책장을 넘기며 야한 성인 소설을 읽고 싶다"며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이 소리 내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