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영웅주의 미명 아래 자신을 불살랐다"

당신들은 나의 증오를 갖지 못할 것이다｜앙투안 레이리스 지음｜양영란 옮김｜쌤앤파커스｜144쪽｜1만2000원

1년 전인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콘서트장에 간 아내를 기다리며 밤늦게 뒤척이던 저널리스트 앙투안 레이리스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당신은 안전한 거죠?' 영문 모를 문구에 깜짝 놀란 레이리스는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파리 공연장 바타클랑(Bataclan)에서 테러.'

긴급 속보에 화들짝 놀란 레이리스는 아내에게 연신 전화를 걸어보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날 아내는 바타클랑에서 열린 미국 록 밴드의 공연에 친구와 갔다. 파리 시내 병원을 온통 뒤져도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다음 날 처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부,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미안한데…."

'당신들은 나의 증오를 갖지 못할 것이다'(이하 '당신들은')는 지난해 IS(이슬람국가)가 일으킨 바타클랑 테러 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프랑스 저널리스트의 수기(手記)다. 하지만 책은 테러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17개월 난 아들에게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한참이나 망설인다. 결국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네보지만 아이는 대성통곡한다. 6개의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아들을 보면서 저자는 말한다. "아이의 첫 슬픔.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진심으로 슬픈 거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비극적 사건 이후의 일상에 대해 담담하게 묘사하는 대목에서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다. 책의 제목인 '당신들은'은 테러 사흘 뒤 레이리스가 테러범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썼던 편지의 제목이다. 저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이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금요일 저녁 당신들은 예외적인 한 사람, 내 평생의 사랑이자 내 아들의 어머니인 한 여인의 생명을 도둑질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나의 증오를 갖지 못할 것이다."

편지이자 책의 제목은 '난 당신을 증오하지 않을 것이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프랑스어를 직역한 제목이 오히려 심금을 울린다. 책의 61~64쪽에는 프랑스어 편지의 원문과 한글 번역본이 함께 실려 있다.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편지를 근래에 읽어본 적이 없는 것같다.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알랭 바디우 지음｜이승재 옮김｜자음과모음｜96쪽｜1만2000원

'당신들은'이 유가족의 슬픔을 담담하게 기록한 에세이라면,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는 팔순을 앞둔 노철학자의 일갈(一喝)을 그대로 담아낸 강연집이다. 프랑스 좌파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바타클랑 테러 사건 열흘 뒤인 11월 23일 파리 북부 오베르빌리에 시립극장에서 테러 사건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 강연한다. 1937년생인 바디우는 1958년 알제리 전쟁 반대 운동에 나섰고, 1970년대에는 마오쩌둥의 극좌적 정치 운동에 투신(投身)했던 프랑스 좌파 지성계의 '백전노장'이다.

그는 전대미문의 테러 행위 앞에서도 "인간이 행한 것 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면서 냉철한 어조(語調)로 말문을 연다. 2차 대전 직후 서유럽의 경제 재건으로 모로코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공장과 일자리가 사라지는 '산업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겪는다. 프랑스 중산층도 이주 노동자와 망명자, 빈민가 주민들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 혐오 같은 배타적 태도를 갖게 된다. 반면 정착의 꿈을 잃어버린 이주민 가정의 젊은이들은 IS 같은 극단적 이념에 빠져든다. 바디우는 강연에서 IS를 "종교적 색채의 파시스트 무장 세력"이라고 정면 비판한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바디우의 논리 전개는 도식적이고 환원주의적(還元主義的)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철학에서 중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대량 학살의 바탕은 허무주의"이며 "터무니없고 인위적이고 범죄적인 '영웅주의' 속에 자신의 삶을 불사른 것"이라는 IS 비판이 담긴 결말에서는 가벼운 전율이 일어난다. 테러 1주기를 맞아 국내 출간된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고 있으면 '테러는 짧고, 영원한 건 진지한 성찰과 사유(思惟)'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