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신탁 비즈니스 급성장… 올 자산 30兆 늘어

은행들이 신탁(信託) 자산의 덩치를 키우고 있다. 신탁이란 믿고 맡긴다는 뜻으로, 금융업에서는 고객이 믿을 만한 금융회사에 돈이나 부동산 등을 맡기면 해당 금융회사가 고객 자산을 운용하고, 관리하고, 처분해주는 것을 말한다. 은행들은 저(低)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예전처럼 이자 따먹기가 힘들어지자, 신탁 수수료 수입이라도 늘리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4대 은행 신탁 잔액 올 들어 30조원 늘어

국민·신한·우리·하나 4대 은행의 올해 10월 말 신탁 잔액은 177조원으로 작년 말(146조원)보다 21% 늘었다. 전통적으로 신탁 업무에 강했던 옛 서울은행을 인수한 KEB하나은행이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신탁 잔액 면에서 압도적인 선두였는데, 올 들어 다른 은행들이 그 뒤를 바짝 쫓아왔다.

은행의 신탁 자산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먼저 고령화가 은행의 신탁 비즈니스 성장에 한몫하고 있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자산이 많은 고령층의 금융자산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더 많이 늘어나는데, 젊었을 때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힘들어져 은행에 맡기는 신탁 수요가 커지고 있다. 또 퇴직연금 신탁처럼 중도에 깨면 세금 혜택을 주지 않는 신탁 상품이 늘고 있어 상품 가입을 그대로 유지하는 고객이 많다. 1%대 금리를 주는 은행예금에 만족하지 못해 주가연계증권(ELS)에 가입하는 은행 고객들이 늘고 있는 것도 한 이유다. 은행은 ELS를 신탁 상품에 넣어 판매한다. 그러나 최근의 증가세는 은행들이 영업을 강화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각 금융그룹의 회장들이 나서 적극적인 신탁 영업을 주문하고 있고, 신한은행처럼 기존 신탁부를 신탁사업부·신탁운용부로 분리해 영업력을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신탁 수수료 이익도 늘고 있다. 우리은행의 3분기 누적 신탁 수수료 이익은 54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340억원)보다 59% 늘었다. 신한은행도 663억원으로 28% 상승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경제성장기에 많은 재산을 축적한 자산가들이 다음 세대로 재산을 안정적으로 넘겨줘야 할 시기가 되면서 신탁의 활용도가 높아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 일본도 고령화와 초저금리가 맞물린 1990년대 중반 이후 신탁 수요가 빠르게 늘었다.

◇유언 대용 등 다양한 신탁 상품

은행들의 신탁 상품 라인업도 다양해지고 있다. 유언(遺言) 신탁이 대표적이다. 신탁 상품에 가입하면 재산 자체는 맡긴 사람의 것이지만, 법률적으로는 은행 등 금융회사가 권리 행사를 한다. 판단 능력이 온전할 때 신탁 상품에 가입하면, 치매 등으로 의사 결정이 힘들어지더라도 은행 등을 통해 정해둔 대로 재산이 관리·처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은행은 2010년 4월부터 '유언 대용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생전에는 신탁자의 의사대로 돈이 운용되고, 사후에는 지정한 몫대로 상속하거나 혹은 기부도 할 수 있는 구조다. 현재 가입자 83명이 총 2700억원을 신탁했다. 한 사람당 33억원 정도를 맡긴 셈이다. 다른 은행들도 '내리사랑신탁'(신한), '명문가문증여신탁'(우리), '골든라이프스마트증여신탁'(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은행 관계자는 "죽기 전에 돈을 물려주면 자식들로부터 홀대받을까 걱정되고, 본인 사후에 상속인들이 재산 싸움을 벌이지 않을까 우려한 자산가들의 문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국민은행은 주인보다 오래 살 반려동물을 위한 '펫(pet·반려동물) 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가입자가 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본인이 죽은 뒤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를 미리 지정하면, 은행이 신탁 가입자가 죽은 뒤 반려동물 부양자에게 돈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1000만원까지 적립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가입 건수는 10건이지만, 문의는 꾸준하다.

국민은행은 나중에 치매에 걸렸을 때 자녀 등 후견인이 치매 치료비나 요양 자금을 은행에서 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은행과 신탁계약을 맺는 '성년후견제도 지원신탁'상품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