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그녀들 "작업실에선 청순 금지입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연남동 경성고 사거리 인근의 한 주택가. 차고를 개조한 작업실 '릴리쿰'에서 '윙윙'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테이블 톱이 돌았다. 레이저 커터기로 뭘 절단했는지 타는 냄새도 난다. 방진 마스크와 두툼한 작업용 가죽 장갑을 끼고 땀 흘리는 주인공은 박지은(36)·선윤아(35)·정혜린(35)씨. 망치, 샌딩머신, 인두기, 직소(jigsaw·전기줄톱), 전기가마 등 '거친' 물건 그득한 공간에서 그녀들은 목공부터 철공, 도예, 전기·전자제품 수리까지 거침없이 해내고 있었다. 한쪽 벽에 걸린 휘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안전제일' '청순 금지'. "하하! 이런 연장들 다루면서 '청순' 타령하고 있다가는 다치기 십상이죠. 손 거칠어지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요."

이들은 서울 홍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동창이다. 각자 컴퓨터디자이너, 공방 도예가로 살다가 모든 물건을 직접 만드는 '메이커(maker) 덕질'에 빠져 회사까지 그만두고 모였다. 스마트폰 UX(user experience) 디자이너였던 박씨는 "휴대폰 소비자들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게 일이었는데, 정작 그 물건의 속을 모른다는 '헛헛함'이 있었다"며 "키보드만 두드리던 손에 접착제와 잉크를 묻히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속을 모르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는 게 이들의 모토. 스마트폰처럼 2~3년 쓴 물건을 버리고, 금방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는 소비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이폰을 분해해 고쳐 쓰는 '수리수리 자가수리' 워크숍도 열었다. 핀란드에서 도예를 배운 정씨는 "직접 물건을 만들면 세상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며 "메이킹은 결국 세상을 제대로 알고 좋은 방향으로 개선해가는 일"이라고 했다.

돈벌이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공방 이름 '릴리쿰'은 라틴어로 '잉여'라는 뜻. 각자 생업을 하면서 당장 쓸모는 없어도 세상에 존재하는 뭔가를 만들려고 모였다. 2011년 이태원 가구거리에 큰맘 먹고 작업실을 얻었다. 규모가 너무 컸다. 임대료 부담에 돈이 궁해졌고, 결국 '멤버십' 제도를 만들어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수시로 사람들을 모아 유료(有料) 워크숍도 진행했다. 박씨는 "뜻밖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여 한번 전문적으로 해 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들이 세상을 헤쳐가는 원동력. 모르는 게 있으면 전문가를 불러 배우고, 해외 사이트에 공개된 '오픈 소스'를 뒤져 정보를 구했다. 내공이 쌓이자 얼마 전부터는 각종 실습용 재료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간단한 회로가 들어간 조립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전자요리' 책과 키트(조립세트)를 국립과천과학관에 1000개 이상 납품하는 '실적'도 올렸다. 최근엔 지난 5년간 경험을 모아 '손의 모험'(코난북스) 책을 펴냈다. 선씨는 "책 쓰고, 이것저것 만들고, 개인 프로젝트까지 추진하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일하느라 '백수 과로사' 위험에 처했다"며 웃었다. "메이커 하면 창조경제니 뭐니 하는데, 우리는 이런 것과 무관해요. 뭔가를 만들면서 '삶의 주도권'을 찾은 사람들이죠." 셋이 함께 쓴 책에는 "물건을 이해하면 사회를 이해하게 되고, '나'를 알게 되고, 변화시킨다"고 적었다. 최근에는 작업실이 '지속 가능'하도록 릴리쿰과 전자요리 두 개의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선씨는 "얼마 전 외부에서 용접 기술을 배웠다"며 "턱 하니 용접기도 마련해서 들여놨으니, 작업실에서 직접 철제 제품을 자르고 이것저것 이어붙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그녀들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