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층 빌딩 아래 웅크린 8.5m 아기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해머링 맨(망치질하는 사람)', 청계광장 소라 모양 조각 '스프링'처럼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공공 미술 작품이 있다. 주위와의 조화가 논란이 되긴 하지만 도시엔 없어선 안 될 요소다. 이 때문에 많은 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공공 조형물 관련 법 조항을 둔다. 우리의 경우 문화예술진흥법에 연면적 2만㎡ 이상 건축물은 건축 비용의 0.5~0.7%를 공공 미술에 써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두고 있다.

123층, 높이 555m. 국내 최대 규모 빌딩인 잠실 롯데월드타워엔 어떤 조형물이 들어올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롯데는 50여억원을 들여 체코 작가 그룹 라스빗 '다이버', 전준호 '블루밍', 김주현 '라이트 포레스트', 노준 '라이프 애즈 마시멜로즈' 등 5개 공공 조각을 설치했다. 이 가운데 가장 공들인 작품이 23일 베일을 벗었다. 예산 30여억원을 투입해 타워 옆 아레나 광장에 설치한 스페인 작가 하우메 플렌사(61)의 작품 '가능성(Possibilities)'이다.

다리를 감싼 채 웅크린 사람 형상의 철 조각(높이 8.5m)이다. 멀리서 보면 하얀 레이스를 감싼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꿈·사랑 같은 한글이 영어·라틴어·힌두어·러시아 글자와 섞여 있다.

"이렇게 거대한 빌딩 옆에 서면 위압감이 들기 마련이지요. 제 조각이 행인과 건물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바랍니다." 골리앗 옆 다윗처럼 앉은 조각 안으로 들어가서 플렌사가 말했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 태아가 웅크린 형태랍니다. 괴로울 때 본능적으로 취하는 자세기도 하고요." 그는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을 끌어안아 주는 엄마의 품, 한편의 시(詩) 같은 포근한 쉼터를 생각했다"며 반드시 작품 안에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길 권했다.

플렌사는 공공 미술의 대가다. 2004년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에 시카고 사람 1000여명의 얼굴을 동영상으로 찍어 만든 '크라운 분수'는 공공 미술의 모범 사례로 통한다. 2009년엔 영국 리버풀 폐광 지역에서 전직 광부들과 함께 조각 '꿈'을 만들어 생기 잃은 도시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이번 작업에선 "서울이라는 도시에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했다.

대규모 쇼핑센터 한가운데에 있는 조각. 상업주의의 최전선 위에 위태롭게 놓인 작품 같다. "소비지향적인 세상에서도 예술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절규하고 있다고나 할까요?(웃음)"

양산된 많은 공공 미술품이 도시 흉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공공 미술은 작가 손을 떠나는 순간,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 된다"면서 "부디 서울 사람들이 내 작품을 잘 돌봐줬으면 한다"고 했다.

"야외 조각엔 '건드리지 마세요(Please do not touch)'라는 경고문이 늘 따라붙어요. 그 뒤에 생략된 게 뭔지 아세요?" 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쓰다듬어 달라(but caress)'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처럼 애정을 갖고 대하란 말이죠. 그게 공공 미술을 대하는 제 태도입니다."

그는 최근 한국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롯데그룹이 연루돼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고 했다. "제 작품이 진짜 말하고 싶은 가치가 뭔지 아세요?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연약하고 껍질만 남은 사람이 속삭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으니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다'라고요." 그가 희망을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