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의 세상 속에선 모두 맨손, 평등하죠"

"내 수의(壽衣) 지을 돈으로 가난한 이들의 옷을 지어달라."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사회부 장관이었던 외할아버지 우촌 전진한(1901~1972) 선생은 눈 감으며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만인은 평등하다면서 노동자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당신이었다.

"장갑 이어 붙일 때면 외할아버지 말씀을 되새깁니다. 장갑이라는 자그마한 세상 속에선 모든 이가 평등하지요. 대통령이나 노숙자나 똑같이 맨손이니까요." 40년 동안 한결같이 '장갑'으로 작업해온 작가 정경연(61·홍익대 미대 교수)이 말했다.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한 그의 개인전이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울긋불긋 단풍처럼 색 입힌 오색 장갑이 어깨 맞대고 캔버스에 정겹게 붙어 있다. 얼굴 마주 보며 깔깔대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편평한 장갑은 솜을 만나 생명체처럼 변신한다. 손끝 부분만 염색한 장갑 수천 켤레에 빵빵하게 솜을 넣어 이어 붙였다. 장갑 손가락이 촉수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장갑을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핀셋으로 일일이 붙이는 수고도 감내한다. 손작업의 도구인 장갑이 해체되고, 다시 손작업을 거쳐 예술로 변신하는 지난(至難)한 과정이다. 작가는 "내 작업은 수행이며, 장갑은 곧 도반(道伴·함께 도 닦는 벗)"이라 한다.

마흔 해 전 미국 유학을 떠나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어머니가 금지옥엽(金枝玉葉) 키워낸 딸의 손이 행여나 무르면 어쩌나 싶어 목장갑을 한 꾸러미 보냈다. 그리움에 눈물 훔치던 딸은 어버이날 깜짝 선물로 어머니께 보낼 선물을 생각했다. 장갑에 색을 입혀 작은 소품을 만들었다. 이를 본 미국인 지도 교수가 "세상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예술"이라 치켜세웠다. 장갑이 그의 인생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매년 1만 켤레, 지금까지 40만 켤레를 썼다.

강산이 네 번 바뀌었다. 장갑도 바뀌었다. 지천으로 널려 있던 민무늬 목장갑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고무 덧대고 기능 입힌 장갑이 출몰했다. 가내수공업으로 정통 방식 고수하는 공장 네 곳에서 장갑을 샀는데, 이젠 그중 하나만 남았단다. "제 예술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몫 하시는 그분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장갑이 정직한 노동의 교훈을 말한다. 전시 다음 달 4일까지. (02)2287-3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