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 진 정부… 5大산업 구조조정 지지부진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최대 골칫거리는 중국발(發)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테레프탈산(TPA)'이다. TPA는 PET병, 폴리에스테르 섬유 등의 원료로 쓰이는 대표적인 화학제품. 정부가 다양한 방법으로 업계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압박했으나, 올 들어서는 감산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철강업 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국내 철강회사들의 후판(厚板·두께 6㎜ 이상으로 선박 건조 등에 쓰이는 철판) 공장 가동률은 60% 수준에 불과하다. 약 40%에 가까운 생산 설비가 그대로 놀고 있는 셈이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천명한 업계 자율 구조조정이 서로 '나는 절대 공장을 폐쇄할 수 없다'는 치킨게임으로 흘러가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死則生의 각오로", 산업계 "제대로 된 것은 全無"

정부가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하겠다"(임종룡 현 금융위원장·경제부총리 후보자)고 천명한 조선·철강·해운·화학·건설 등 5대 취약 산업의 구조조정이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철강·화학 산업은 자체 구조조정을 거의 하지 않고 있고 해운·조선산업은 구조조정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가고 있다. 그마나 선방했던 건설업계마저 최근 주요 업체들이 거액의 적자를 내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국내 화학업체는 올 들어 10월까지 TPA 생산량을 2000t 줄이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구조조정용' 감산이 아니라 계절적 요인에 의한 공급량 조절이다. 현재 국내에서 TPA를 생산하는 업체는 한화종합화학, 삼남석유화학, 태광산업, 롯데케미칼, 효성 등 5개사(社). 이들은 지난해 10월 각각 생산량을 10~30% 줄인 이후 감산을 멈춘 상태다. 최근 2~3차례 만나 감산 논의를 가졌지만, 결국 "당장 감산은 안 된다"며 "설비 통합도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세계 TPA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석유화학협회는 현재 전 세계 TPA 물량이 170% 이상 공급과잉 상태이며, 앞으로 몇 년간 공급과잉이 해소되기 어렵다고 내다보고 있다.

철강업 구조조정도 또다른 시한폭탄이다. 현재 국내 철강사들의 후판 생산 능력은 월 평균 120만t을 웃돌지만, 수요 부족으로 실제로 생산하는 후판은 80만t 안팎에 불과하다. 정부는 후판 설비 폐쇄 등 자율적 구조조정을 진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업계는 서로 눈치보기만 하고 있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공장은 한번 폐쇄하면 재가동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며 "후판 수요가 언제 살아날지 몰라, 업체끼리 구조조정을 서로 미루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세계 5위 선사'로 키우겠다고 야심차게 발표했던 현대상선은 최근 "세계 최대 해운동맹으로부터 가입 퇴짜를 맞았다"는 보도가 해외 언론에서 나왔다. 글로벌 해운동맹(선박·노선을 공유하는 해운사 연합체)에 가입하지 못하면 영세 해운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오보"라고 부인했지만 해운업계에서는 "국내 1위 한진해운이 8월 말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 이런 보도가 나올 정도로 한국 해운업의 국제적 입지가 약해졌다. 해운업이 공멸의 위기에 처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조선업도 비슷한 처지다. 금융 정책을 책임지는 금융위원회와 산업 정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는 몇 달째 대우조선해양 존폐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3대 조선업체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회사별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책을 쓰고 있지만 중구난방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대규모 인수합병이 이뤄지고 있는 중국·일본 조선업과 비교할 때,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져 산업 자체 위기가 대두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마나 선방했던 건설업도 위기론

5대 취약 업종 중 가장 상황이 좋았던 건설업에서도 최근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저유가로 인한 해외 사업 부진이 좀처럼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데다, 지난 2년여간 활황세를 보였던 국내 주택 경기가 내년부터 대출규제, 공급과잉 등의 여파로 식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대형 건설사 중 3개사(社)가 올 들어 3분기까지 누적실적에서 해외 사업 수익 악화 등의 영향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포스코건설은 지난해 3분기까지 227억원이던 순이익이 올해는 4115억원 감소한 3888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GS건설은 올 3분기까지 31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해 적자 전환했고, 삼성물산도 건설 부문에서 830억원의 영업적자가 발생하면서 연결 기준 2374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구조조정 작업이 최근 국내 정치적 혼란과 리더십 실종 문제와 맞물려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면서 “이대로 방치하면 정치적 이슈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구조조정 작업에 지금이라도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