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배우는 역사… 웃음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난 19일 저녁 주부 강마리(41)씨는 TV 채널을 돌리다 MBC '무한도전' 출연자들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투사들을 고문하는 데 쓰였던 도구를 소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유명 강사가 나와 한국사를 들려주고, 개그맨과 유명 래퍼가 이를 바탕으로 곡도 만들었다. 강씨는 "마치 장난치듯 웃으며 고문 기구를 다루는 게 마뜩지 않았다"면서도 "마냥 웃고 떠들기만 하는 다른 프로그램보다는 그래도 초등생 아들이 배우는 게 있을 것 같아 '채널 고정'을 했다"고 말했다.

◇'역사 예능' 전성시대

요즘 TV에선 소위 '역사와 놀기'가 유행이다. 토크쇼나 재연(再演) 형식을 통해 역사를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케이블 채널 tvN은 지난 22일 처음 방송한 인문 토크쇼 '동네의 사생활'에서 경복궁 내 고종의 비밀 서재인 '집옥재'를 찾아갔다. 한때 4만권의 장서를 자랑했던 이곳에서 고종과 구한말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준다. 지난 27일 KBS2 '1박2일'에선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과 갑신정변 발발 연도를 묻는 역사 퀴즈가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형 역사 예능이 해외에 팔리는 경우도 있다. '역사 체험 리얼리티'를 내건 tvN '렛츠고 시간탐험대'(종영)는 중국 '쓰촨(四川)위성'에 포맷이 수출됐다.

EBS 수능강의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큰별쌤' 최태성 교사가 진행하는 '문화유산 코리아'나 KBS1 '역사저널 그날' 등은 전문 교양 프로그램이지만, 재연 기법을 섞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다. 요즘 방송가에 나오는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안 중에는 역사와 예능, 역사와 교양을 결합한 유형의 프로그램 제안서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출판, 강연과 결합… '쏠림' 극복해야"

한국사 콘텐츠가 많아진 것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당장 올해부터는 대입 수능에서 한국사가 필수다. 삼성·SK그룹 등은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직무적성 시험에서 한국사 비중을 늘리는 추세고, 현대차그룹은 역사 에세이까지 써야 한다.

한국사 관련 책 판매도 늘었다. 교보문고에선 작년 동기 대비 올해 1~10월의 한국사 관련 도서 판매량이 33.5% 증가했다. 그러나 일부 스타 강사에게 치우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MBC 무한도전에 나와 전국적으로 얼굴을 알린 설민석 강사가 베스트셀러 10위 내에 3권을 올렸고, '조선왕조실톡'의 웹툰 작가 '무적핑크'가 2권을 기록했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최근 한국사 관련 콘텐츠는 스타 강사와 강연 시장, 출판, 방송 콘텐츠 제작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했다"면서도, "방송으로 유명세를 얻은 특정 필자들의 책만 팔리는 '쏠림 현상'은 출판계가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지나친 단순화, 흥미 위주로 흐를 우려"

검증 안 된 콘텐츠나 잘못된 내용이 TV라는 막강한 전파 수단을 타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지난 5월 OtvN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선 한 수능 사회탐구 강사가 현대 화가의 작품을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의 작품으로 잘못 소개해 물의를 빚었다. 공희정 방송평론가는 "예능 프로는 복잡한 역사적 사실을 흥미 위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며 "재미만 좇으면 진지한 성찰을 할 기회는 사라진다"고 말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역사를 강연용으로 드라마화하는 능력과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전혀 별개 영역"이라며 "TV 예능에 나온 정도 내용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한쪽에선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의 방향을 놓고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가운데, TV에선 스타 강사들이 벼락치기 암기 과목처럼 전달하는 '역사 예능'이 인기인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