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닥칠지 모를 공포… 관객 마음에 지진 일으킬까

"우리 형이 그랬다. 저거 엄청 큰 밥솥이라꼬. 저거 덕분에 우리가 다 호강하고 산다꼬."

모락모락 흰 수증기를 피워내는 원자력발전소 앞바다에서 물놀이하던 아이들이 말했다. 개발도 안 되고 관광객도 오지 않는 마을, 아이들은 자라서 아버지를 따라 원전 직원이 되고, 수명이 다한 원자로 폐쇄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욕하면서 무감각하게 현장을 지킨다. 그때, 갑자기 닥쳐온 지진이 일상을 무너뜨린다. 냉각 밸브 고장에 원자로 노심이 녹아내리고, 원전 지붕이 폭발해 날아가며 전국이 잿빛 방사능 분진 같은 패닉에 휩싸인다. 정치인들은 진실을 은폐하려다 들켜서 허둥대고, 평범한 원전 직원들만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사투 속으로 뛰어든다.

다음 달 7일 개봉하는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가 29일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제작 기간 4년에 총제작비 155억원, 동원된 배우만 6280여 명의 대작. 전작인 재난 영화 '연가시'(2012)로 452만 관객을 모은 박정우 감독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새들이 떠나고 쥐 떼는 바다로 뛰어드는데, '낙하산'으로 임명된 원전 책임자는 윗선 눈치를 보며 대재앙을 막을 기회를 놓친다. 우유부단한 대통령(김명민)은 "내진 설계가 됐다는데 왜 균열이 생기느냐"고 묻는다. 주변 주민은 반경 20㎞ 안에 94만명, 30㎞ 안에 340만명. 우왕좌왕하던 관료들이 "비상 대피 계획 같은 건 없다"고 무표정하게 보고할 때, 극장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최근 한국엔 유독 인재(人災)가 많았다. 속절없는 희생이 이어지는데 '시스템'이 시민을 못 지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보통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분노보다 체념 또는 실소에 가까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엘리트 기득권층'은 제 살기에 급급하고, '소시민 영웅'들은 희생으로 재앙을 해결해 가는 대립 구도가 만들어진다. 이 구도에서 영화의 목표는 '막상 이 일이 내게 닥칠 때, 구원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보통 사람들 마음 바닥의 공포를 휘저어 끌어올리는 것이다. 외항 선원이 돼 떠나려다 사고에 발목 잡힌 원전 직원 재혁(김남길)은 말한다. "사고는 정부가 쳐놓고 수습은 국민더러 하라고?"

한국 관객은 메르스 사태 때 '연가시'와 '감기'(2013)를 떠올렸고, '터널'(2016)을 보며 세월호를 생각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재앙을 TV로 지켜보고, 방폐장이 있는 경주에서 발생한 강진도 몸으로 겪었다. 이 압도적 현실 앞에서, '영화 속 재난이 은유보다는 뻔한 직설에 가깝다'거나, '사회 비판을 가족·영웅주의로 환원하는 식상한 구조'라는 비평은 "생트집"이라고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원전 폭발 등을 묘사한 CG는 화려하고 배우들의 눈물 연기도 고품질. 그렇다고 감성적 음악과 가족애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해운대'(2009)의 전략을 답습한 것에까지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다. 생뚱맞게 대통령이 "모든 원전을 폐쇄한다"고 선언하는 장면, 설교하듯 이어지는 '반(反)원전' 메시지도 부담스럽다. 감동을 재촉하는 후반부가 늘어져, 상영 시간 136분은 길다. '12세 관람가'치고는 잔인한 장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