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딱' 망한 나를 일으켜 준 '정약용의 편지'

3년 전까지만 해도 정재엽(42·사진)씨는 '자타공인 금수저'였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제약회사는 연매출 180억원을 올렸다. 그는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를 다닌 뒤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귀국 후 아버지의 제약회사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할 때만 해도 "더 높은 곳만을 바라봤고 내 앞길에는 꽃잎만 가득할 줄 알았다"고 했다.

2013년 7월부터 불운이 겹쳤다. 약속어음 수억원을 결제하지 못한 제약회사가 부도났다. 전문 의약품의 보험 수가가 하향 조정되면서 영업이익이 급감했지만 부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채권자 200여 명이 회사에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정씨는 졸지에 망한 회사를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가 최근 펴낸 '파산 수업'(비아북)은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이 책이 독특한 건,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문학과 역사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파산 체험과 독서 일기가 맞물려 있다. 회사가 부도를 맞은 날 "카프카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한 마리 거대한 독충으로 변해버리고 싶었다"고 쓰는 방식이다.

이듬해 아버지가 구속된 직후 정씨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는 "지옥 같은 시간, 힘든 하루하루를 책으로 견뎠다"고 말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신의 처지를 곱씹었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폐족(廢族·무거운 죄 때문에 출세길이 막힌 집안)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는 구절이 마음에 박혔다고 했다. "처음에 책은 암울한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 수단이었지만, 점차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자 감정의 상처를 달래주는 위안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조언해주는 자기계발서가 됐다."

2014년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업 회생절차 개시 결정을 받은 정씨는 1년 반 동안 채권자 200여 명을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지난해 12월 의료 기기 제조·유통 회사와 인수·합병(M&A) 계약을 맺었다. 기업회생 과정도 마무리됐다. 아버지는 지난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정씨는 "3년간 혹독한 '파산 수업'을 받은 셈"이라고 했다. 직원 3명을 둔 의약품 수입업체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연매출 1억원 남짓이라서 회사를 일으켜야 하는 처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