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자동화 열풍'… 無人카페·로봇 간호사까지 등장

지난 8월 싱가포르 외곽 센캉 지구 HDB아파트 단지에 싱가포르 최초의 무인 자판기 카페가 문을 열었다. 두세 평에 불과한 이 무인 카페 개점식 때 타르만 샨무가라트남 부총리가 직접 참석해 화제가 된 곳이다. 지난 9일 찾은 이 카페엔 오렌지색의 최신형 자판기 10여 대가 벽면을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각각의 자판기는 메인요리부터 디저트, 즉석 오렌지 주스, 샌드위치와 과자 등을 판매 중이었다. 커다란 모니터가 부착된 메인요리 자판기에서는 동남아식 볶음밥부터 구운 연어, 미트볼 스파게티 등 20여 종의 음식을 고를 수 있었다. 가격은 3~5싱가포르달러(약 2400~4000원). 동전을 집어넣고 메뉴를 고르자 2분 만에 따끈한 음식이 일회용 용기 안에 담겨 나왔다. 편의점에서 파는 냉동식품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아파트 주민 와이 팅씨는 "호커센터(싱가포르식 푸드코드)에 비하면 양이 적고 가격이 다소 비싼 게 단점이지만 집에서 가깝고 간편해서 가끔 이용하는 편"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내년부터 이 같은 자판기 카페를 본격적으로 늘려갈 계획이다.

본래 HDB아파트 단지와 호커센터는 싱가포르 국민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장소다. HDB 단지마다 조성돼 있는 오래된 호커센터에서는 노점상들이 몇십 년째 음식을 만들고, 동네 주민들은 이곳에서 식사뿐 아니라 교류와 친목을 다진다. 그런 점에서 HDB 단지 안에 호커센터 대신 들어선 자판기 카페는 싱가포르 사회가 직면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무인화와 자동화의 물결이다.

◇무인 택시에서 로봇 간호사까지…거센 자동화 바람

무인화·자동화는 저출산·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는 싱가포르가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대안이다.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인 1.24명(2015년)으로, 이 정도 출산율로는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건설 노동자나 청소, 가사도우미 같은 힘들고 처우가 좋지 않은 일자리를 인도·필리핀·미얀마·인도네시아 등 주변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해 왔다. 당초 싱가포르 정부는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통해 현재 500만명가량인 인구를 2030년까지 650만~690만명으로 늘려 경제 규모를 키워 간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대규모 반(反)이민 시위로 표출된 이후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여 경제 성장을 이어간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중에서도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생산성은 낮은 음식료 산업이 정부의 무인 자동화 정책의 최대 타깃이 됐다. 현재 음식료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16만명으로 싱가포르 전체 근로자의 4.5%를 차지하지만,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8%에 불과하다. 타르만 부총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더 이상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기술력을 향상시켜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노동력 부족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 정부는 45억달러를 들여 23개 주요 산업의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음식료 업종을 첫 번째 사례로 선정했다. 디지털 기술과 로봇 등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업체에는 다양한 지원과 보조금을 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싱가포르 음식점 가운데 로봇 요리사와 웨이터, 무인 주문 키오스크, 자동화 주방 등을 도입하는 곳이 빠르게 늘고 있다.

자동화 바람은 음식점에 그치지 않고 공장과 도로, 병원 등 곳곳으로 확산 중이다. 정부가 '자동화'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적극 밀어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의 한 스타트업 업체는 지난 8월부터 세계 최초의 무인택시 시험 주행을 싱가포르에서 진행하고 있다. 난양공대(NTU) 연구팀은 육상교통청(LTA)과 협력해 조만간 자율주행 무인버스 시험 운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사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벽에 페인트칠을 할 수 있는 로봇 페인트공, 목적지를 입력하면 혼자 알아서 움직이는 자율주행 스쿠터, 도로를 스스로 청소하는 자율주행 청소차 등도 이미 개발이 완료돼 시험 운영되고 있거나 개발 중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인간을 닮은 로봇을 유치원에 배치해 보조교사로 활용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관할하는 정보통신미디어개발청(IMDA) 관계자는 "5~10년 뒤면 수퍼마켓에서 로봇 계산원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아이들에게 로봇과 함께 살아갈 사회를 미리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병원들은 2~3년 전부터 로봇 간호사를 도입해 사용 중이다. 이런 로봇들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의 재활 프로그램을 돕거나 약국에서 약을 조제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골라내는 역할을 맡는다. 올해 싱가포르에 문을 연 IBM의 인공지능센터 왓슨과 협력해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거나 병을 진단하는 데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병원도 늘고 있다.

◇일자리 3분의 1이 사라진다는 전망도

싱가포르 사람들은 자동화의 물결에 대체로 순응하는 분위기다. 실업률이 2%대로 매우 낮아 일자리 부족을 체감하기 어렵고, 잘 갖춰진 IT 인프라 덕에 국민이 신기술을 쉽게 받아들이는 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정부 소유인 언론들도 새로운 로봇이나 기술 개발을 긍정적으로 보도한다. 변호사인 스티븐 탄씨는 "로봇의 도입과 자동화는 외국인 노동자를 거부한 싱가포르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정부의 발 빠른 움직임이 로봇 산업을 주도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싱가포르도 '자동화의 역습'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싱가포르 국민이 기피하는 저임금 일자리뿐 아니라 대기업·은행·로펌 등 화이트칼라 일자리에서도 로봇프로세스자동화(RPA)라는 이름으로 기계가 인간을 조용하지만 빠르게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이런 기술들은 단순 반복 작업은 물론이고 펀드매니저를 대신해 자산을 운용하거나 인사팀 직원을 대신해 지원자의 이력서를 검토할 수도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올해 초 낸 보고서에서 "자동화로 인해 싱가포르 전체 일자리 중 3분의 1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낮은 실업률과 구인난에도 실질임금이 정체되고 일자리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3분기 싱가포르 일자리는 전년 대비 3300개 줄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을 보였고, 특히 제조업 일자리는 8분기 연속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