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질감 좌우하는 건 악장… 유럽에선 여전히 '리더'라고 불러"

"200년 전만 해도 지휘자가 따로 없었어요. 악장(樂長)이 막대로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췄죠. 음악이 복잡해지고 악단이 커지면서 지휘자가 필요해졌어요. 미국 오케스트라의 외국인 상임지휘자는 1년에 석 달여(15주)만 악단에 머물러요. 그 이상 있으면 세금을 더 내야 하거든요. 지휘자가 없을 땐 악장이 오케스트라 '얼굴' 노릇을 하며 후원을 끌어와야 해요. 유럽에선 악장을 여전히 '리더'라고 불러요. 100명의 리더!"

악장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이 남자는 1999년 서른여섯에 미 동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악장으로 입단해 18년째 악장을 맡고 있는 데이비드 김(53)이다. 재미교포 2세로 줄리아드 음악원을 나온 그는 이 악단 설립 99년 만에 탄생한 첫 동양인 악장. 지난 9일 서울시향 연주회에 객원악장으로 참여한 그에게 악장의 역할을 물었다. 서울시향 악장은 지난해 말 전 스베틀린 루세브가 물러난 뒤 현재 비어 있다.

◇첫날 첫 연습 30초 안에 궁합 맞아야

116년 전통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유진 오르먼디, 리카르도 무티,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등 대가들이 거친 명문(名門)이다. 2012년부터 야닉 네제 세갱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김 악장은 "이름난 지휘자도 악단과 처음 만날 땐 긴장한다. 젊은 지휘자는 바지가 덜덜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 그걸 풀어주는 것도 악장의 몫"이라 했다. "에셴바흐가 단원들한테 연주 방향을 얘기하고 지나가면서 저를 스윽 쳐다봐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I agree(그 해석에 동의한다)'라는 긍정적 답변을 주죠. '넌버벌(nonverbal) 커뮤니케이션'이 틀어지면 전 단원이 냉랭한 기운을 느끼니까요."

"첫날 연습 30초 안에 서로 잘 맞는지 판가름난다"고 했다. "6년 전 야닉이 처음 왔을 때 그의 이름도 몰랐지만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을 10초 만에 멈추고 다시 시키는데 느낌이 딱 왔어요. '이 사람인가?' 줄리엣 강(제1부악장)과 눈빛을 교환했는데 2년 뒤 실제로 야닉이 음악감독이 됐거든요."

◇'필라델피아 사운드'… 비결은 활

오케스트라 음색은 지휘자와 악장이 상의하지만 악장의 역할이 크다. 크고 작고 여리고 강한 제각각의 소리를 섞어 근사한 와인처럼 빚어내는 건 오롯이 악장이 해야 할 일. 악장이 바뀌면 소리 질감이 달라지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가 밝힌 비결은 활에 있다. "활을 빨리 움직이면 프랑스풍이 나요. 독일 음악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빠다' 입힌 소리는 활 속도가 느려야 해요."

김 악장은 필라델피아 악장 오디션에서 러시아 연주자와 경쟁했다. 하필 198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그가 6등 할 때 1등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바이올린을 더 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천성 덕분에 제가 낙점됐다"고 겸손해했지만 그의 바이올린 실력은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악장은 지휘자가 조용히 물어볼 때만 빼고 밖에선 악단 단점을 지적하지 않아야 한다"며 "지휘자처럼 악장도 단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인간관계가 곧 인생"이라고 했다.